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문학동네, 2014)을 읽고
어쨌거나 뭔가 하긴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해보는 거야.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인생이야. 그렇지 않아? (p.163)
불행한 삶의 연속, 희망은 어디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2018)에는 인생의 불행과 고통을 겪으며 ‘뭔가’를 시도하는 삶의 이야기 12편을 담고 있다. 실업, 가족해체, 어린 아들의 죽음, 배우자의 외도, 알콜 중독, 관계의 단절, 소통의 부재 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가득하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적막한 삶을 살던 인물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작은 시작’을 이어간다. 이는 작가의 삶과 닮아 있다. 경제적 압박과 불안정한 결혼 생활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가 이를 극복하며 새로운 삶을 살았던 작가의 인생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레이먼드 카버 : 뛰어난 소설가, 리어리즘의 대가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인 레이먼드 카버(1938~1988)는 ‘미국의 체호프’, ‘리얼리즘 대가’로 불리며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1960년에 첫 단편 ‘분노의 계절’을 발표한 이후 1988년까지 소설집과 시집, 에세이 등 열권의 책을 펴낸다. 1983년에 출간한 세 번째 단편집 <대성당>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소시민의 삶,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소설집 <대성당>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소시민의 삶을 보여준다. 단편 ‘비타민’의 화자의 아내인 ‘패티’는 하루 종일 비타민 방문 판매를 하고도 매일 밤 일하는 꿈까지 꾸지만 시대의 변화로 직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작품 ‘열’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꿈을 위해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간 아내 때문에 배신의 상처로 분노하는 남편 ‘칼라일’이 등장한다. 또한, 단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의 주인공 ‘제이피’는 원하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술을 계속 마시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아내를 폭행하고 치료소에 들어간다.
희망의 실마리 : 대화와 소통
작가는 무너진 삶 속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대화와 소통에 두고 있다.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8살 아들의 죽음을 겪은 부부과 제과점 운영에 매여 인간성을 잃어가는 빵집 주인이 서로의 상황을 토로하며 소통하는 장면이 나온다.
빵집 주인의 진심어린 위로(사과)와 함께 “내가 만든 롤빵을 좀 드시지요. (...)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롤빵과 커피를 부부에게 건넨다. “따뜻하고 달콤했던” 롤빵을 먹은 부부는 이제 “신경써서 귀를 기울”(p.127)여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작더라도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건네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타인을 향한 작은 관심의 표현이다. 들이닥치는 불행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지만, 고통 가운데 서로에게 이런 관심을 주고 받을 수 있다면 다시 삶을 일으키고 한 걸음씩 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서로를 향한 관심
표제작 '대성당'의 감동과 여운
표제작 ‘대성당’은 소통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면서 삶의 희망적인 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화자는 아내의 오랜 친구 시각장애인 ‘로버트’와 시간을 보내면서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뭔가’를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 화자는 아내가 테이프를 통해 10년 넘게 대화하는 로버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표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TV화면의 대성당 장면을 더 자세하게 듣고 싶었던 로버트가 화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화자가 눈을 감고 두꺼운 종이 위에 펜으로 성당을 그려나갈 때 로버트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 놓고 성당을 그리는 방법이다. 이에 두 사람은 두 손을 포갠 채 대성당을 그린다. 로버트는 “조금만 더 하면 우리가 여기에 뭔가를 진짜 만들게 되는 거야.”(p.310)라며 화자를 격려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는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p.311)라며 말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화자에게 '뭔가'는 무엇일가. 어떤 경험을 한 것일까. 아내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화자. 소설에는 아내가 로버트와 주고 받은 테이프를 듣다가 중간에 멈추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데 일부러 듣지 않는다. 아내는 그 테이프를 화자에게 주었던 행동 이면에는 남편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리면서, 그동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아내의 그 마음을 알아차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최고의 소설가, 뛰어난 단편소설집
<대성당>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든 일상의 아픔과 상처를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와 대화문, 행동의 서술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자세한 묘사나 감정적 호소를 배제하고 사회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데도 독자는 가혹한 현실과 인간적 한계를 더 사실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동시에 소설은 폐허가 된 삶의 곳곳에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을 과장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인물 간의 미묘한 관계성과 함축적인 대사, 빠른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도 끝까지 ‘작은 시도’를 놓치지 않는 인물과 마주하며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간결하고 함축적인 단편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독자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미국 현대문학을 알고 싶은 독자나 단편소설의 정수를 만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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