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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입니다 Mar 31. 2024

비밀을 지켜주세요

쿨톤 - 분홍색 분위기미인



비밀     


  송유리의 비밀 그러니까 병명은 ‘감정 홍조증’이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 송유리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요약되었다. 낯선 공기와 낯선 사람 앞에서 쉽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 조그만 손으로 엄마의 치맛자락을 어찌나 세게 잡아당기는지, 고무 밴드로 된 치마를 입은 날에는 엄마의 얼굴도 함께 붉어졌다. 본격적으로 증상이 발현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영어 말하기 대회 본선 날이었다. 송유리네 반에서는 3명이 지원했는데 송유리만 예선을 통과했다. 어차피 2학년, 3학년 언니들이 한 번에 출전하기 때문에 수상 욕심은 없었다. “경험 쌓는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해, 가볍게!” 담임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교실 뒷면 게시판을 재정비하여 빈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자꾸만 송유리를 지긋하고 다정하고 불편하게 바라보았다. 전날 원고를 최종 수정하여 메일을 발송했을 때도 ‘우리 유리’ 고생이 많다고 답신을 보냈다. 당일 아침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추첨한 발표순서가 공개되었다. 



  송유리는 두 번째 순서였다. “2번! 딱 좋아~” 담임선생님은 벌써 우수상을 거머쥔 사람처럼 기뻐했다. 첫 번째 발표자의 발표는 한마디로 유창했다. 발음과 억양과 시선처리에서 자연스러운 외국물이 느껴졌다. 한차례 소란스러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다음 참가자인 송유리 입장에서는, 그 소리의 여운을 가득 떠안고 무대 위로 올라야 하는 것이 약간 반칙 같았다. 이어 핀 조명이 송유리 아래로 떨어졌고, 발표를 시작했다. 시작한 이상 3분은 순식간에 흘러갈 것이다. 한 음절 한 음절 노래를 부르듯 이어갔다. 그런데 중간쯤에 유리 입에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저기… 저 처음부터 다시 갈게요…” 망했다.            

 

쿨톤 - 분홍색 분위기미인



  그 순간, 눈에 흰자위를 가득 드러낸 담임선생님의 경악이, 앞에 놓인 종이에 탈락을 체크하는 심사위원의 빠른 손놀림이, 실망과 비웃음이 섞인 관중석의 눈빛이, 30초 남았음을 알리는 진행위원의 사무적인 사인이, 전부 유리의 뇌리 속에 HD 화질로 녹화되었다. 코피가 터졌다. 콧구멍을 틀어막고 도망치듯 무대에서 내려왔다. 곧바로 달려간 곳은 2층 여자 화장실이었다. 거울 앞에 선 유리는 움찔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얼굴에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붉은 반점이 몇 개나 올라와 있었다. 옅은 것도 있었고 짙은 것도 있었다. 팔뚝 옆으로 소름이 스쳐갔다. 살그머니 고개를 숙여 교복 상의 안을 들춰 보았다. 악! 거기도 있었다. 심장 쪽에 가까울수록 더욱 크고 선명한 자국이 보였다.            



  다음 날, 송유리가 돌돌 만 이불을 따라 몸을 잔뜩 웅크리는 동안 방밖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아침이 펼쳐졌다. 오늘의 교통상황을 전하는 기상 캐스터의 경쾌한 목소리, 샤워기가 바쁘게 물을 토해내는 소리, 익숙한 그릇들이 심심찮게 부딪치는 소리, 신문이 넘어갈 때마다 신세계가 활짝 펼쳐지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마냥 신난 강아지 노랫소리까지, 1분 1초가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송유리는 그 분주한 박자에 초조함을 느끼며 오늘 학교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헤아려 보았다. 어제 조퇴를 해버렸으니 개근상은 물 건너갔고, 앞으로 매일매일 학교에 갈 자신을 잃어버렸으므로 오늘은 첫 번째 결석일로 적합한 날이다. 문제는 엄마다. 어제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한국어를 말해 버린 것과 조퇴한 것, 두 가지 모두 말하지 못했다. 만약 오늘 자신이 자발적인 결석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엄마가 알게 될 세 번째 사실이 된다면…… 천장 위로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한 번도 혼내지는 않았지만 자주 실망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엄마도 그랬어′였다. 그 말 역시 가끔은 위로가 되었지만 자주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결석하는 인생은 힘들겠지. 학교는 가야겠지. 유리는 체념한 듯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유리, 일어났니?” 오늘따라 엄마 목소리가 한층 더 다정해서 짜증이 났다.         


                   

  오늘 당번 누구야? 이렇게 별 일 아닌 호명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날들이 이어졌다. 되도록 뭇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행동반경을 좁히고 실수를 통제했다. 학교에서의 일과는 단짝 친구 하고만 나누었다. 학원 수업은 꼭 필요한 단과 특강 위주로 들었다. 원체 머리도 좋은 편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성적이 날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송유리가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매일 하는 기도가 있었다. 

 ―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님이시여! 진심이 통하는 세상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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