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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실론티, 딜마 티룸

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12

by 이정미

90년대까지 한국은 홍차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일하게 알던 홍차는 빨간 캔에 든 ‘실론티’였다. 새콤달콤한 그 맛이 원래 홍차의 맛인 줄 알다가 나중에 진짜 홍차를 처음 접하고 당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론’은 스리랑카의 옛 이름이고 스리랑카는 홍차의 대표적인 산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홍차 브랜드에는 스리랑카의 다원에서 생산한 실론 홍차가 있다. 대체로 오렌지색에 가까운 선명한 빛깔, 씁쓸하면서 상쾌한 맛과 향이 특징이다.


스리랑카에는 홍차를 전 세계에 수출하는 유명한 브랜드가 여러 개 있고 딜마는 그 중 하나다. 다른 스리랑카 브랜드들과 구분되는 딜마의 특징은 재배 지역에 따른 특징을 잘 살려서 상품을 출시한다는 것이다. 같은 스리랑카산 홍차라도 어느 지역에서 재배하느냐에 따라 풍미가 천지차이이다. 딜마의 스리랑카산 홍차 중에는 다른 브랜드의 실론 제품과 같은 씁쓸하고 상쾌한 홍차뿐만이 아니라, 마치 아쌈처럼 몰트향이 나고 달큰한 홍차, 다즐링처럼 가볍고 섬세한 홍차도 있다. (오로지 스리랑카산 홍차만을 판매하는 브랜드는 아니기 때문에 인도의 다원에서 생산한 진짜 아쌈과 진짜 다즐링도 있다)


2010년대 중반에 딜마의 티룸이 연희동에 있었다. 딜마는 여러 나라에서 직접 ‘티 라운지’를 운영하고 있지만, 연희동의 티룸은 그 중 하나는 아니었고 한국의 딜마 수입 판매처가 운영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판매처에서 홍차에 대한 교육을 받은 ‘티마스터’들이 딜마의 홍차 여러 종류를 정성스럽게 우려내서 팔았다. 홍차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고, 딜마의 찻잎과 티웨어도 구입할 수 있었다.


IMG_0615.JPG 티룸 한켠을 장식했던 딜마 로고의 액자.


이층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 건물의 내부를 목재와 화분으로 꾸며서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차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해가 잘 드는 큰 창문 앞의 공용 테이블을 애용했다. 평일 오후에는 손님이 없어서 그 넓은 테이블을 나 혼자 차지했다.


딜마 03.JPG 햇빛이 잘 들던 커다란 공용 테이블. 내가 자주 먹던 누가 케이크와 홍차.


메뉴판에는 홍차와 허브차 등을 합쳐서 수십 가지에 달하는 차가 있었다. 끄트머리에 커피가 딱 한 종류 있었는데, ‘티마스터가 내려서 맛없는 커피’ 라는 설명이 여러 손님을 웃게 했다. 차에 곁들일 수 있는 간단한 간식도 몇 종류 있었다. 내가 자주 먹었던 것은 진하고 부드러운 누가 케이크였는데, 해동을 덜 한 채로 내놓아서 아이스크림 같을 때도 있었다.


홍차를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으로서 새로운 홍차 전문점을 발견할 때마다 반가움과 걱정이 교차한다. 점점 성장하고는 있지만 한국의 홍차 시장이 아주 작다는 것을 항상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걱정했던 대로 딜마 티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연희동 카페거리에서 금세 밀려나 김포의 허허벌판으로 옮겨가더니, 그마저도 없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수입 판매처는 그대로 남아서 딜마의 찻잎을 계속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있고, 홍차 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딜마 외에 한국에 수입되는 스리랑카 홍차 브랜드로는 베질루르와 믈레즈나가 있다. 믈레즈나는 딜마와 비슷하게 한때 화곡동에 매장 겸 티룸이 있었다가 없어졌고 지금은 수입처만이 남아 있다고 들었다. 베질루르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꽤 오랫동안 운영하던 티룸을 2021년에 닫은 대신 전국 여러 곳의 대형 쇼핑몰에 티룸을 열어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아이스크림과 보틀 밀크티를 무기로, 평소에 홍차를 자주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손님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베질루르.JPG 딱 한 번 가 봤던 가로수길의 베질루르 티룸. 세련된 인테리어와 알찬 메뉴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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