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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Nov 09. 2018

충혼(忠魂)의 비를 품은 불곡산

제4구간 불곡사길 - 한국전쟁의 격전지, 깊어가는 가을 정취 

한국전쟁의 격전지 불곡산


불곡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등산로에는 누비길 안내판과 영남길 안내판이 나란히 서 있다. 흡사 불곡산 길을 두고 누비길이니 영남길이니 서로 아웅다웅하는 폼새다.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참나무 우거진 숲길이건만 여기는 경기옛길 중 하나인 영남길이니 아니면 성남 시경계 등산로인 누비길이니 하는 것은 모두 분심(分心)에서 나오는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곡산 정상을 기점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산 비탈면 쪽으로 정상에서 마주친 정자가 다시 나온다. 이곳에 정자가 들어선 것도 나름 이유가 있는데, 정자 마루에 들어서면 사방 시야가 탁 트여서 산 밑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시내를 관통하는 넓은 시내가 보였다. 도심 중앙에는 탄천이 흐르고 아파트 숲 뒤로 태봉산 줄기와 그 너머 청계산 망경대도 보였다. 뒤로도 바라산과 백운산, 광교산도 아스라이 보였다. 그 너머는 구름인지 능선인지 하늘과 산 경계를 뚜렷하게 짓지 못하고 뿌옇다.

한 여름 정자에서 내려다본 시내. 아파트 숲 뒤로 태봉산 줄기와 청계산이 보인다.

정자 옆에 영남길 이야기라는 해설판이 서 있다. 영남길은 길 따라 스토리텔링을 만들었는데, 이곳의 테마는 ‘불곡산과 한국전쟁’이었다. 내용인즉슨 이 일대는 1951년 1월 25일부터 2월 18일 사이 서울 재탈환을 위해 벌인 썬더볼트 작전 중 국군, UN군과 북한군, 중공군 간의 치열한 격전지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공세 속에서 한강 이남까지 밀려난 연합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불곡산, 법화산, 검단산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서울을 재탈환할 수 있었다.

2018년 4월의 호국인물로 불곡산에서 용맹을 떨친 터키의 장교 야즈즈 준장이 선정되었다.
  썬더볼트 작전에서 투르크의 후예라는 터키의 공로가 매우 컸다. 터키의 장병들은 그들보다 40배 많은 중공군의 견고한 진지를 소총에 총검을 꽂은 뒤 돌격하여 중공군에 패배를 안겼다. 죽음을 각오한 터키군은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장렬하게 적진지로 달려갔다고 한다. 외신에서 서구사회 테러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테러범들이 외친 ‘알라후 아크바르’가 불곡산 등지에서 울려 퍼졌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6.25전쟁 당시 타흐신 야즈즈준장과 터키군 모습 [출처 국가보훈처]


비단 UN군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젊은이도 이 산에 많은 피를 뿌렸는데, 대지산에서 가파르게 내려가는 길 둔덕 위로 평상과 소총 위에 철모가 걸려있는 조형물이 있다. 그곳은 6.25 전쟁 전사자 유해와 유품 발굴지점이라는 팻말과 함께 유해 4구와 유품 45점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유해 발굴 절차를 보여주는 해설판과 호국용사 유품이라는 소총과 총알 등을 사진으로 전시했으며, 유품 중에는 머리빗도 있고 시계도 있었다. 빗발치는 총격전이 끝나면 땀에 젖은 머리칼을 다듬을 줄 알았고, 폭탄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촌각을 다투는 전투에서도 회중시계를 꺼내보는 젊은이일 것이다. 애꿎게도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건 젊은이다.

불곡산길에서 만나는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터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볼 수 있는 불곡산


정자가 놓인 길부터는 정자동 시가지로 가는 샛길이 많아 사람들이 많이 하산하였다. 등산로는 그 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비로소 완연한 숲길처럼 낙엽도 쌓이고 인적도 드물게 되었다. 오는 동안 사람들 틈 속에서 바쁜 듯이 잰걸음으로 왔었다. 산길이 호젓해지니 발걸음도 느려지고 가쁜 숨도 진정이 되었다. 산길은 지나온 활엽수림과 달리 스트로브잣나무나 리기다소나무, 소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골고루 많이 자라났다. 활엽수림도 나름 숲이 활력 있게 보이나 침엽수림은 숲의 그윽한 풍취를 보여준다.

소나무 숲 위로 산불감시탑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다 한가운데 서있는 등대지기처럼 감시탑도 숲 한가운데 외따로이 서 있다. 시민 전망대라는 높은 산불감시탑에 오르면 정자에서 내려다본 풍광보다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불곡산 정상에서 내려오면 산불감시탑이 있으며, 이는 시민에게 개방된 전망대이다.

                                                                       

가을에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잎을 가진 침엽수사이를 누비길은 걷는다.


불곡산 오를 때의 번잡스러움과는 달리 내려가는 길은 마주치는 사람이 드물다. 산행 막바지에 이른 안도감 때문인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빠지며 나무들 속을 천천히 걸는다. 홀로 산에 왔으니 보폭이 느리다 탓하는 이도 없으니 느리게 걸을 수 있다. 가끔은 산속에서 느리게 걷는 여유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비로소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인다. 가까이에서는 잎사귀와 멀리 서는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먼저 산속에서 여러 나무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질감의 나무줄기와 길고 짧은 나뭇가지, 좁고 기다란 잎도 구분할 수 있다.

불곡산은 참나무 숲이라 짙은 갈색의 낙엽만 무성하다.


그래도 가을은 단풍이 제멋이다. 단색의 참나무 숲에서 만나는 단풍나무 몇 그루는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단풍나무 한 그루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 산 중턱에서 찬 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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