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07. 산 페드로, 과테말라
엄마!!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너무 좋아서
과테말라에는 여러 호수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는 "아티틀란(Lago de Atitlán)"이다.
과테말라의 보석이라 불리는 이 호수는 해발 1,562m에 있으면 세 개의 화산(산페드로, 톨리만, 아티틀란)이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호숫가에는 작은 마야 마을들이 흩어져있다.
그 마을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은 파나하첼(Panajachel)인데 관광객이 가장 많고 교통의 거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요가, 명상, 힐링 스팟으로 유명한 산마르코스(San Marcos), 전통 마야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한 마을 산티아고(Santiago),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숙소와 활기찬 분위기의 산 페드로(San Pedro)도 유명하다.
우리 가족은 산 페드로에 숙소를 두고 주변 마을들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 아홉 시, 우리를 산 페드로로 데려다줄 오기로 한 차량이 나타나지 않았다.
길가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기다리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여행사와 몇 차례나 전화를 주고받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밴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탔는데, 기사에게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와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스스로를 달래며 자리에 올랐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안티구아의 아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오전 10시 안티구아를 출발한 미니밴이 지그재그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로 풍경은 시시각각 바뀌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굽이길을 버티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3시간 반동안 흔들리고 휘청거리다 보니, 산 페드로에 도착했을 때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런데 고개를 들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모든 피로를 단숨에 삼켜버렸다.
거대한 호수가 유유히 누워 있고, 그 뒤로는 우뚝 솟은 화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빛은 눈부시게 파랬고, 잔잔한 물결은 마치 오랜 길 끝에 도착한 여행자를 다독이듯 속삭였다.
좁은 골목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졌고, 그 길 위로는 알록달록한 벽화와 가게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냥 걷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마을을 거닐다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좁은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골목 끝엔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이어지고 그 아래에는 작은 빨래터가 있었다.
여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빨래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샤워도 하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카메라를 꺼내고 싶었지만, 왠지 실례가 될 것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다.
근데 이든이가 호수에 들어가고 싶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귀찮은 마음이 앞섰지만, 빨래터엔 성인 남자는 없어서 남편은 위에 남고 나와 이든이만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아티틀란 호수에 발을 담가보았다. 차갑고 상쾌한 물결이 발끝을 감싸왔다.
'아까 오다가 개똥 밟았는데 여기서 다 씻기겠네.'
골목 사이사이로는 커피 향이 진하게 퍼졌다. 이곳은 원두 산지로도 유명해, 작은 카페마다 직접 볶은 원두를 내세우며 여행자들을 불러 모았다. 어딜 들어가도 오래된 나무 테이블과 창가 너머로 보이는 호수 풍경이 어우러져,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우리도 내일 카약 타보자.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그치지 않길래 나 혼자 우비를 입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어제의 분주하던 골목도 오늘만큼은 고요했다. 빗속에 잠긴 마을은 마치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매일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 속에서, 이렇게 간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 낯선 마을의 고요한 풍경을 홀로 마주하다니.
비를 가득 머금고 짙어진 마을의 풍경, 젖은 돌길, 호수 위로 흩뿌려지는 작은 빗방울, 우산 대신 모자를 눌러쓰고 빠르게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했다.
늦은 오후 드디어 비가 그쳐 카약을 타러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와 이든이는 카약을, 남편은 패들보드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구명조끼를 입은 이든이를 카약 앞자리에 태우고 노를 저어 나아갔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바다처럼 넓고 깊어 보이는데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니.
왠지 철학적(?)인 기분이 들어 '인생은 노를 젓는 것과 같다'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이든이에게 해댔다.
처음 도전하는 패들보드라 처음엔 몇 번 휘청거리며 애를 먹더니, 어느새 균형을 잡고 우뚝 서 있었다.
호수 위에서 흔들림 없이 노를 젓는 모습이 제법 멋졌다. 역시 운동신경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다 싶었다.
"어? 이든아 뒤에 무지개!!"
그리고 그 옆으로 또 하나의 무지개
"와! 쌍무지개다!"
"엄마! 나 눈물이 날 것 같아! 너무 좋아서"
이든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말에 나도 가슴이 뭉클해져 눈가가 젖어들었다.
앞으로도 우리 함께 좋은 거, 멋진 거 많이 많이 보자!
며칠 전엔 이든이가 말똥을, 어제는 내가 개똥을 밟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행운이 온 건가 하고 이든이에게 농담처럼 이야기했더니 그럼 앞으로 똥을 많이 밟아야겠다는 아이
"일부러 밟는 건 효과가 없어"
무지개를 보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금세 하늘이 다시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른 돌아가자!” 서로를 재촉하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져 폭우로 변했다.
셋 다 물에 흠뻑 젖어 그야말로 그지꼴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길 위에서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쌩비를 맞아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이든이는 생애 처음일 듯.
젖은 머리칼, 축 늘어진 옷, 발에 철썩 달라붙는 샌들까지… 모든 게 우스꽝스러워서, 오히려 그 순간이 너무 즐겁게 느껴졌다.
비 속을 헤치며 걷다가, 문이 열려 있는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서는 이든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이든이가 그 문 앞에 서자, 안에서 한 아저씨가 다가와 케이크 한 조각을 휴지에 싸서 내밀었다.
우리는 젖은 몰골 그대로 감사 인사를 하고 케이크를 받아 들고 돌아섰다.
빗줄기에 케이크가 망가질까 봐 옷 속에 꼭 감추고 뛰었는데, 아무래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젖어 버릴 것 같았다.
결국 어느 처마 밑에 멈춰 서서 꺼내 먹었는데, 또 이 상황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케익은 또 왜 이렇게 맛있던지 또다시 깔깔거리며 웃음이 터졌다.
"엄마! 나랑 엄마 몰래 아빠도 똥을 밟은 거 아닐까?"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집에 도착하니, 마치 하루 종일 뛰어놀다 돌아온 어린아이처럼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가볍고 충만했다. 무지개를 보고, 쌩비를 맞고, 낯선 마을 사람에게서 케이크 한 조각을 얻어먹은 하루.
여행이란 결국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창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이어졌지만, 우리 셋은 그저 따뜻한 웃음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보다 더 행복한 하루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