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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 Feb 09. 2022

그런데 꼭 서울에 살아야 할까

답정너 주의보

언제부턴가 집순이가 됐다. 원래 이렇게 집을 좋아했었나 싶을 정도로 웬만큼 밖에서 볼 일이 마무리되면 냉큼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하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걸 떠나 내 집은 나의 생각과 마음이 머무는 곳, 잠을 자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 고양이가 머물렀다 가는 그런, 내가 가장 나답게 머물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공간이다.


생각해 보면 집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때도 분명 있었다. 꼭 집 밖 어디론가 나가서 익숙한 집안 풍경과 냄새 그리고 집안일들에서 멀어져야 공부든 일이든 손에 잡히던 때도 있었다. 그건 이 집에서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이후로 재택 하는 사람이 늘어서인지 아니면 나처럼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서인지, 앉을자리 없이 빽빽하기 일쑤였던 집 근처 카페들에서 몇 시간이고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 중 하나를 담당하곤 했다. 언젠가부터는 그 사이에 속하지 않게 되었지만.


2020년 10월, 나의 마지막 정규직 직장을 퇴사하면서 이 집으로 이사 왔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는 제대로 직장 출근이라는 걸 꾸준히 길게 해 본 날들이 잘 없다. 잠깐씩 다녔던 회사들에 출근하는 며칠 동안은 희열마저 느껴졌는데, 나름 일정 시간에 회사에 갔다가 돌아오고 하는 그 익숙한 일상이 오랜 추억이 된 나머지 그리움 같은 감정이 생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집은 내가 서서히 집 안에서만 지낼 수 있도록 나 자신에게 최적화되어갔다. 무기력증이 한창이던 지난 8월 식물들을 한 아름 사와 집안 여기저기에 두고 길렀다. 누가 누굴 돌본 건지 우울했던 마음은 곧 나아졌다. 임보 했던 고양이 하리도 1년 동안 다른 가족들과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리가 돌아오기 전에 이제 완전히 하리를 가족으로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짐을 많이 버렸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싶게 만드는 공간이 됐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쓰레기가 되는 것들을 많이 비우고 나니 그 자리는 더 좋은 것들로만 채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광진구 자양동에 자리를 잡게 된 건, 출퇴근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줄곧 스타트업에서 일해왔던 터라 혹시 퇴사를 그만두고(?) 다시 직장을 잡더라도 강남이 될 것 같았고, 창업을 하며 얻었던 작은 지하 사무실도 선릉에 있었다. 강남은 너무 비싸니 그나마 가능한 수준의 동네로 온 거였는데, 역시 서울에 혼자 산다는 건 비용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가끔 강남이나 성수 갈 일이 있을 땐 좋긴 하다만, 이 집에서 산지도 거진 2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나 왜 이런 상황에 이 동네에서 살고 있지? 매일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 공간을 유지하는 게 어쩌면 당분간 또는 한동안은 일정한 벌이가 없을 나에게 너무나도 사치가 아닌가 싶은 거다. 고정 비용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꼭 집이어야 할까, 갖가지 고민이 거리를 걷기만 해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생각이 많아질 땐 별생각 없이 옷 주워 입고 집 근처 한강공원으로 간다.


이제 낮에는 날이 많이 풀려 봄이라도 오고 있나 싶은, 입춘이 지난 요즈음의 한강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너무 말도 안 되게 좋잖아. 이곳 서울이 아닌 좀 더 비용이 적게 드는 다른 곳으로 가보자 쪽으로 명쾌하게 결론이 날 줄 알았던 산책에서 조금 더 무리하더라도 이곳에서 좀 더 지내보자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고작 2년 채우고 떠나기엔 이곳에서 좋은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는걸. 바라던 대로 창업도 해보고, 살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됐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고, 사랑하는 하리도 함께 살게 됐고,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공간 때문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공간에서 이렇게 계속 잘 지내다 보면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 같은 게, 이 공간을 정리하고 떠나야 하는 다른 수십 가지 이유를 이겨버리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이 좋다. 복작복작하다가도 조금만 걸어 나오면 널찍한 한강이 펼쳐지고, 그 한강 위로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풍경을 사랑한다. 사람이 많은 덕분에(?) 늦은 밤에 걸어도 무섭지 않고, 온갖 좋은 카페와 맛있는 음식점이 넘쳐나는 이곳이 좋다. 같은 비용이면 서울 근교로만 나가도 방이 한 개는 더 생기겠지만. 그럼 그만큼 가스비며 전기세며 그 방 채울 인테리어 비용이며 더 드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설득해봤다. 이렇게 계속 서울에 사는 것이, 매 달 들어오는 수입도 없이 쉬어가기를 선택한 나에게 무모한 치기이자 사치일지언정, 당분간은 이대로 버텨보기로 했다. 아니, 살아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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