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와 함께 한다는 든든함
의사 선생님께 그날 밤의 두려움과 내가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말하면서도 다시 두려움이 느껴져 무서웠다.
"제가 너무너무 잘 못한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몸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더 미쳐버리겠더라고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런 공포를 느꼈겠어요. 몸을 둥글게 말아 이불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죠. 마치 아기처럼 공포를 느끼는 거예요. 아기들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잖아요. 그런 부모와 사이가 틀어지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무서운 게 당연해요."
"미친 듯이 화가 나다가 또 죽을죄를 진 것처럼 두렵고... 이런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서 제가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진짜 이러다 미쳐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정인씨는 지금 전문가와 함께 하고 있잖아요. 그날 밤도 무사히 잘 넘겼어요. 화를 너무 참다 보니 한 번에 터져 나와서 그래요. 이건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해요. 화 못 내던 사람은 화를 내기 시작해야 치료를 잘 끝낼 수 있거든요. 계속 화 못 내면 못 끝내요."
'전문가와 함께 한다'는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그렇게 힘이 될 수 없었다. 이게 꼭 필요한 과정이고 치료가 잘 되고 있다는 사인이라니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미치지 않고 이 과정을 지나갈 수 있겠구나.'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화가 너무 많이 나는 게 무서운데 약을 먹어서 조절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화가 나본 적이 없거든요. 제 스스로가 무서워요."
"화를 조절할 수 있는 약이 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그동안 눌러온 화가 겨우 올라온 것이니까 조절하기보다는 잘 느끼고 다뤄주는 것이 필요해 보여요. 너무 무섭다면 처방해 줄 수는 있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필요 없어 보여요. 화를 무조건 행동화하지 않고 잘 느끼고 다룰 수 있으면 괜찮아요."
선생님 말에 수긍이 가서 약은 처방받지 않기로 했다. '미치지 않고 이 과정을 지나갈 수 있겠구나.'하고 안도했다. 이 엄청난 화를 표현하면 주변이 불타버리고 나까지 불타 없어질 것 같아서 두려웠었다. 그런데 화를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잘 느끼고 다루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차곡차곡 켜켜이 쌓여있던 화가 단단한 지반을 뚫고 드디어 솓아 오른 것이니 나의 화를 존중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선생님과 화가 났었지만 눌러왔던 경험들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전문가와 함께 하는 든든함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 내 오뚝이 인형 밑바닥이 조금 더 채워진 듯했다. 그리고 나도 잘 회복해서 앞으로 만나게 될 내담자들의 가장 힘든 순간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든든한 상담전문가가 되리라 다짐했다.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난 뒤, 햇살 한 줄기가 비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