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dolf Apr 21. 2021

아주 슬픈 (12&13/20)

12     


미연은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대사관에서는 그리로 보내고 말고 할 권한이 없었다. 또한 미연을 언제까지 대사관 안에서 지내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보낼 수도 없고. 카라카스에 있는 200명도 채 안 되는 한국 교민이나 주재원에게 연락해 볼까 하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현재로서는 미연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연은 마약조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 무척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베네수엘라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릴 수도 없다. 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일부러 그럴 리는 없겠지만, 베네수엘라 정부 내 곳곳에 심겨져 있는 마약조직의 끄나풀들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가장 확실한 것은 미국의 도움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약조직으로 새어나갈 경우 한국대사관이 어떠한 피해를 입을지 가늠조차 안 된다. 대사관 직원들이 저들의 공격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대사관에서는 대한민국 외교부와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미연에게는 알리지 않고 미국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보다는 그쪽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3     


송연은 자신이 자란 고아원으로 향했다. 온양에서도 시골로 한참 들어간 곳이다. 온양온천역을 지나 전철 1호선 남쪽 끝 신창역에서 내려 버스로 신정호수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창암농장이 나온다. 그곳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황산리에 경찰학교가 들어서 있고, 송연이 자란 고아원은 사거리 왼편 신정호수 쪽이다.

    송연이 어릴 때는 한적했던 호수 주변이 지금은 완전히 변해 생활체육공원과 관광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야외음악당이 두 곳에나 있으며 수상스키장까지 들어서서 거대한 유원지가 되었다. 그러나 송연의 고아원은 호수 건너편의 옥련암 가는 쪽에 있었다. 그나마 그 고아원은 오래전에 큰 화재가 나서 없어져 버렸다. 송연은 초등학교 때 그 고아원에서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갔었는데, 그곳은 송악 너머 유구 쪽에 있어서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 보육원마저도 송연이 중학교 때 원장이 큰 비리를 저질러 구속되면서 많이 어려워지면서 정부 지원이 줄어들어 제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그때 송연은 성품도 얌전하고 학교 성적도 아주 좋아 어느 집에서 양녀 삼겠다고 데려갔었는데, 얼마 후에 그 집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그 뒤 주변의 추천을 받아 다행히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다.

    지금 송연이 신정호수  점량동 쪽으로 가는 것은 누구를 찾기 위함이 아니다. 그곳은 너무 어릴  지낸 고아원이라 기억도 희미하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어떤 추억이라도 떠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송연의 기억 너머 갓난아기  자신이 그곳에 흘러들어온 사연에 대한 귀띔이라도 얻을  있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그곳 이후의 보육원은 어렸을 때와는 상관이 없어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은 얻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어렸을  기록은 화재로 인해 모두 없어졌다고 들었다. 원장 역시 병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가서 자신어린 시절 기억을 찾을  있단 말인가? 송연은  바람이라도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호수 옆길을 걸었다.

    사실 바람이 꽤 불고 있었다. 비와 함께. 호수의 물도 출렁거리고. 평소 같으면 수상스키 타는 사람이 꽤 있었을 텐데 한두 사람인가 호수 건너편 쪽에서 달리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비바람이 부는 날에 수상스키가 괜찮은지 모르겠다. 안전요원들이 허락을 해준 걸까?

    송연은 공연한 걱정을 한다.

    송연은 조그만 우산을 쓰고 있지만 바지 아래쪽은 차가운 비바람이 마구 때리고 있었다.

    호수 옆길, 그보다는 호반이라고 해야 더 운치가 있으려나, 그 호반 길을 걸으면서 이곳 고아원에서 자랄 때의 기억을 최대한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단편적인 것만 몇 가지 생각날 뿐, 그것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람들 얼굴도 몇몇 떠오르긴 했다. 희미하게. 형체는 없이 안개 속에 퍼져 있는 듯한 모습으로. 어쩌면 이것은 송연이 그동안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난날을 모두 지우려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연이 자신의 모든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도 남들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송연은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싫었던 것처럼 남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연은 사람들과도 거의 어울리지 않았고, 혹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의 다 잊어버렸고, 아니 잃어버렸고, 현재는 고달프고, 미래는 너무 멀다. 그러니 무슨 얘깃거리가 있을까. 그런 탓에 송연은 늘 혼자였다.

    아, 비가 너무 많이 오는구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랫도리는 벌써 흠씬 다 젖고 윗도리에도 빗방울이 날아든다.

    송연은 평소 생각지 않으려 했던 과거를 이번에는 일부러 찾기 위해 이곳에 왔으나, 오히려 보통 때보다 더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희미했던 그 잔영마저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아쉬웠다. 그동안 추억을 나무라며 거부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제는 윗도리의 아래 반도 거의 다 비에 젖었다. 호수 건너편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늘과 호수의 경계도 없어져 버렸다. 호반의 풍경도 다 사라졌다. 오직 하늘에서 세차게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빗줄기만 보일 뿐이었다.

    송연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바람을 덜 맞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힘들어서. 노아 시대처럼 비가 퍼부어 물이 차오르고 가슴에까지 올라와 목으로 턱으로 물이 넘실거리며 당장이라도 입으로 코로 마구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렇게나 되어버렸으면. 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물에 잠겨 사라져 버렸으면. 그러나 송연은 안다. 설령 송연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물에 잠겨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버젓이 남아 저 홀로 빛나게 우뚝 서 있으리라는 것을.

    송연은 울었다. 송연의 기억으로는 중학교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이 났다.

    그 할머니. 다리 살짝 전다는 할머니. 사실 송연의 눈에는 다리 저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말을 듣고 나서 그러려니 생각했을 뿐.

    그 할머니의 눈. 눈빛.

    이 억수 같은 빗속에서 왜 하필 그 눈빛이 생각나는 것일까?

    갑자기 송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들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다음 화로 계속]

이전 10화 아주 슬픈 (10&11/2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