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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Aug 06. 2024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 다시는 울지 않으리


가련한 무궁화. . .


청일전쟁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 1894~95년 청나라와 일본이 맞부딪친 전쟁. 그러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의 몫이었다. 그 전쟁은 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 전쟁은 1894년 7월 25일 일어나서 다음 해인 1895년 4월 17일 끝났다. 10개월 동안 치러진 것이다. 그것도 상당 부분은 남의 나라인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한민족에게는 치욕적인 이 전쟁의 이름을 한중일에서는 각각 다르게 부른다. 한국에서는 청일전쟁, 일본에서는 일청전쟁,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갑오전쟁(甲午戰爭).

    이 전쟁의 진행상황은 이러하다.

    첫 번째 전투는 해전으로서 1894년 7월 25일 풍도해전. 이곳의 위치는 왼쪽으로는 덕적도, 위쪽으로는 영흥도, 아래쪽으로는 태안반도 위의 난지도, 오른쪽으로는 제부도 사이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풍도 인근 해역. 일본 함대가 매복해 있다가 텐진항을 출발해서 아산만으로 이동하는 중국 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두 번째는 7월 29일 경기도 성환전투.

    세 번째는 9월 12~15일 벌어진 평양전투. 이때 청군은 을밀대 전투에서 항복하고 일본군은 평양성으로 진입했다. 사상자는 일본군 180명, 청군은 2천 명 전사에 부상 4천 명. 글자 그대로 청군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후 청군은 압록강 쪽으로 퇴각하고, 청군 포로들은 일본군에 의해 참수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네 번째는 9월 17일의 황해해전으로서, 압록강 하구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청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다섯 번째는 11월 21일 요동반도 끝에 있는 뤼순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이때 일본군이 뤼순을 완전히 점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해를 넘겨 1895년 2월 산뚱반도에서 벌어진 전투로, 이때 청나라 북양함대의 기지인 웨이하이웨이가 일본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대만과 팽호 열도까지 점령하며 청나라를 동시다발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의 병력은 총 35만 명, 일본은 24만 명. 그리고 전함은 청 34척(4만 톤), 일본 52척(5만9천 톤). 전사자는 청 3만, 일본 1만3천.  



그 이후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두 나라는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청나라의 완패로. 한마디로 무능부패의 천국 중국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당시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렀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피해는 오롯이 조선의 몫이었다. 그 전쟁의 주요 무대는 한반도의 서해바다와 경기도 성환, 그리고 평양이었으니까. 특히 청군과 일본군 양쪽 모두 조선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재정이 파탄나고 말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중국 본토에서도 전투가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어가고 있을 시기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의 첫 장면은 바로 평양에서 벌어지는 중국과 일본의 전투에 대한 것이다.      

    

    일청전쟁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 .     



이 평양전투에서 다리에 철환 파편을 맞은 조선의 한 어린 소녀가 일본 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은 뒤 어찌어찌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미국으로 가면서 새로운 문명을 만나 신여성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소설의 작가는 그 유명한 이인직(李人稙, 1862~1916). 그에게는 한국 신소설의 개척자라는 명성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원각사와 협률사


이인직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하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의 조선어통역관을 지냈으며, 당시 친일 기관지인 《국민신보》와 《만세보》의 주필, 매국신문인 《대한신문》의 창간 등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뿐만 아니라 이완용의 개인비서까지 했다. 그 이후 정부 관료로 발탁되어 여러 일을 했으며, 연극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1908년 원각사(圓覺社)를 세우고 한국 최초의 신극인 《은세계》를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이완용의 오른팔이 되어 일본 관리와 만나서 한일합방을 적극 추진하는 등 극도의 매국행위를 했다. 그가 이러한 활동을 벌이긴 했지만 낭비벽이 심한 탓에 재산은 별로 축적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떻든 그가 한국문학과 연극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참고로, 원각사는 우리나라에서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이지만, 한자를 달리해서 원각사(圓覺寺)라는 절을 검색하면 전국에서 여러 사찰이 검색된다. 아무튼 극장인 원각사는 2천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극장은 당시의 협률사(協律社)라는 작은 극장을 개조하여 1908년에 근대식 극장으로 세운, 일종의 국립극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원각사는 로마식 원형극장이며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현재 서울의 신문로에 있는 새문안교회의 터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셈이다. 참고로 협률사는 2층 500석 규모의 상설극장.

    


청일전쟁 다시 보기     


자, 그럼 청일전쟁이 이 시점에서 왜 등장했을까? 인천 시립박물관에서는 2024년 7월 30일부터 ‘청일전쟁 130년 다시 재(再)보다’라는 기획특별전을 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남의 나라에서 벌인 그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이었던 것이다. 이에 흔히 구한말이라고 하는 그 처참한 시기의 상황을 되짚어 보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벌어질 당시 한국의 국호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었으며, 1897년 10월 12일 건국해서 1910년 8월 22일까지만 존속한다. 그리고 1910년 9월 29일 경술국치로 국가로서의 운명은 끝나고 일본제국에 편입되어 식민지가 된다.

    대한제국은 13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만 이어진 단명 국가였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의 건양 2년, 즉 1897년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으며, 영문명은 Empire of Korea. 이 국호로 당시 모든 수교국이 공식 승인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해 갔으며, 급기야 1904년 7월에는 치안권을, 8월에는 재정권을,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에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그 사실이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표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끝이 났다.  

    역사에는 만일이 없다지만, 정말 만일에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고종에 이어 1907년 7월 19일 황제로 즉위한 순종이 끝까지 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으면 어떠했을까?      



아아, 대한민국……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의 그 웅장한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삼천리 금수강산 대한국민이면 어찌 이 노래를 모를 수 있으랴. 1993년 2월 15일에 발매된, 얼마 전 고인이 된 김민기 가수의 ‘아침이슬’이나 ‘가을편지’ 등과 함께 수록된 가슴 벅찬 그 노래…….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노래로만 그칠 수는 없다. 외형상으로는 세계 10대 부국이라고 하지만 아직 세계 정치와 문화에서는 우리의 의지나 바람보다는 다소 뒤처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세계적 명성을 얻는 여러 아티스트들이나 문화체육계 영웅들이 출현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있으며,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등지로까지 우리의 문화가 퍼져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서구 열강이 일궈놓은 뿌리 깊은 문명에 대등하게 맞서기에는 다소 역부족한 상황이다.



타고르 시인과 주요한 선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예언이 있다. 세기의 지성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성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또한 저작권 문제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전문을 수록한다.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등불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이 시는 시인이며 동시에 언론인이자 정치가로도 활동했던 주요한(1900~79) 선생이 번역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 시는 ‘불놀이’. 아래에 그 시의 첫 연과 마지막 연만 소개한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전문을 싣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란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 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 .

[중략]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   



[참고]

여기에 '파리 만국박람회와 황제의 밀사'라는 제목의 사이트 하나를 알려드린다. 이 사이트를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도 참여했는데, 그 당시 프랑스의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0년 12월 6일자에 한국관 삽화가 실렸다. 현대적인 감각에서 보아도 무척 세련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진은 여러 사이트에 실려 있지만, 이 사이트의 것이 가장 선명한 듯하다. 다만 저작권 문제로 그 사진을 곧바로 옮겨올 수는 없을 듯하고, 그 대신 위쪽에 글 제목을 소개했으니 그것을 치면 곧바로 그 내용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여러 사이트에 그 사진이 많이 실려 있으니까 다른 방법으로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참고로 당시 조선은 1893년에 열렸던 미국의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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