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티컵(Teacup) 강아지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티컵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아담한 강아지인데, 안 그래도 귀여운 강아지들을 앙증맞게 축소해 놨으니 꺅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는 티컵 몰티즈 ‘반디’를 분양받았다. 족보도 있는 순종 강아지라고 으스댔다. 아무리 티컵 강아지라도 자라면 결국 몸집이 커져 티컵에 들어가지 못한다지만, 반디는 다 컸을 때에도 2kg을 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작았다. 잔병치레도 잦았다. 반디가 10살이 된 해에 특히 많이 아팠고, 24시간 여는 동물 병원을 몇 달간 오고 간 끝에 무지개다리를 건너 강아지 별로 긴 여행을 떠났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도 지구는 돌아간다고… 반디 없는 세상에 새로 적응하는 마음으로 출근길을 나섰다.
출구가 필요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외면하고 싶었다.
반디가 떠난 지 딱 2주 되는 날, 친구 욥과 충동적으로 일본 교토에 도착했다.
교토에서 맞이한 첫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구름과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보라색 트램에 몸을 싣고 아라시야마 대나무숲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파래졌다. 은은하게 뜨겁고 선선한 바람을 맞는 대나무 사이를 고요히 걷다가 야트막한 가츠라강가에 앉아 편의점에서 산 망고 요거트를 먹었다.
큰 뜻도 욕망 없이 한국을 떠나 온 나는 욥의 뒤를 졸졸 따랐다.
여기는 강이네. 탄천처럼 평화롭다. 여기는 힙한 곳인가 봐. 예쁘다. 그냥 여기 들어가서 먹자.
그때의 우리는 지치지도 않았는지 거의 일곱 시간을 뽈뽈 돌아다녔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욥은 나를 대형 서점으로 데려갔다. 기념품, 소품, 서점 세 공간으로 나뉜 규모를 보자마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여름이라고 챙겨 온 샌들이 문제였다. 얇고 평평한 밑창을 일곱 시간 동안 끌고 다니니 온 발과 종아리에 무리가 온 것이다. 호기심을 가득 안고 침착하게 서점 내부를 탐색하는 욥과 달리 나는 종아리의 아우성과 서점의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도망쳐 서점 앞 철제 벤치에 앉아 종아리를 두드리고 주물렀다. 서점 문이 끼익 열릴 때마다 욥일까 기대하다가 수차례 실망하다 보니 20분이 지났다.
붉은 수채화 물감을 퍼뜨리며 해가 사라져 가자 아쉬운 마음이 들어 급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다시 서점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어 근처 마을을 거닐었다. 정사각형의 빵집 간판이 시선에 걸려 홀린 듯 들어갔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 다정함이 감싼 동네 빵집. 시오빵과 길쭉한 소시지를 돌돌 감은 페스츄리를 샀다. 초면인 시오빵을 번역기로 찾아보니 소금빵이라고 한다.
소금빵?
소금빵이라 불리는 소라 모양의 밀가루 반죽을 물었지만 기대했던 ‘소금 앙금’이나 ‘소금 크림’ 같은 것은 없었다. 실망 뒤에 곧바로 고소한 버터와 빵 위에 굵게 뿌려진 소금 몇 톨의 맛이 느껴졌다. 새로울 것 없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더운 날 뻘뻘 땀을 흘리며 성실하게 일한 이가 건네는 손과 같은 확실한 위로. 나의 인생 첫 소금빵은 그렇게 휴식을 건넸다. 소금빵과 온전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욥이 있는 서점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크게 다쳤을 때, 커다랗게 뻥 뚫린 어느 곳을 메워준 소금빵의 맛. 한쪽으로 불균형하게 기울어진 위태로운 양팔 저울의 한쪽 팔에 소금을 톡톡 얹으니 양팔 저울은 중심을 찾기 위해 파르르 떨렸다. 열심히, 혹은 일말의 집착으로 한 방향으로 치우쳐버려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을 때, 자리로 돌아오는 관성이 쉽사리 작용하지 않을 때, 그렇게 고장 날 때, 뒷 덜미를 거세게 잡아당겨 줄 것을 일상에서 찾아 조금씩 쌓아간다. 반대 편에, 휴식의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