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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빵의 추억 04화

도넛: 누운 소도 일으키는 맛

by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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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누구보다 치열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미술학원으로 이동해 밤 10시까지 미대 입시반 수업을 들었다. 주말에는 1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있는 미술학원으로 갔다. 토요일에 치과 치료를 받고 마취가 채 풀리지도 않은 입과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는 또래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고3 학생들이 단체로 해방을 외치는 수능 날에도 시험이 끝나자마자 미술학원으로 향했고, 수업이 늦게 끝나면 찜질방에서 쪽잠을 잤다.


학원 수업을 마친 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리는 밤 10시 반쯤, 언제나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가끔 장 볼거리가 있으면 슈퍼마켓에 들르기도 했다. 어린 날 재래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산대 근처의 빵 코너를 눈으로 꼼꼼히 훑었다. 크림빵, 보름달, 소보루 같은 클래식 빵 사이에 하얗고 조그마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도넛 전문점에서만 볼 수 있었던 하얀 도넛이 슈퍼마켓에 당차게 들어온 것이다. 작지만 단단한 구석이 있는 녀석은 곱디고운 하얀 분으로 보송하게 단장했고, 아마 새콤달콤한 딸기잼을 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어둠이 깔린 길에서 그새를 못 참고 하얀 가루를 입 주변에 잔뜩 묻히며 도넛을 배어 물었다. 인생 최대 몸무게를 달성하게 해 준 그 녀석, 참 밉지만 덕분에 질긴 마라톤을 어찌어찌 버텨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이라면 으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

자취방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프랜차이즈 도넛 가게의 주말 오픈조가 되었다. 사람들이 느긋하게 이불속에 숨어버린 주말 아침 7시에 가게를 열고,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을 궁리하며 집을 나서는 낮 3시에 일이 끝났다. 도넛 가게라 도넛을 맘껏 먹으리라는 기대 했었지만, 현실은 마감조 친구들이 도넛을 모두 가져가 우리 앞으로 돌아오는 도넛이 없었다.


무더웠던 8월의 어느 날, 아르바이트로 하루 종일 서 있느라 퉁퉁 부은 무다리를 끌고 집에 돌아와 드러누웠다. 언제든 누울 수 있게 방에 이불을 깔아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은 뭐 하고 놀지, 누구는 뭐 하고 있을지 따져보는데 그날따라 알바 중 봤던 도넛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화이트 초콜릿 코팅 위에 코코넛 가루가 뿌려진 바나나 모양의 바나나필드. 안에는 바나나 필링이 가득하다. 분홍 초코 코팅이 씌워져 있는 하트 모양의 핑크듀얼하트. 화이트 초코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 도넛은 반을 갈라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반은 딸기 필링이, 반은 바바리안 필링이 들어있어 한 번에 두 가지 도넛을 먹는 듯하다.


방금 도넛 가게에서 알바를 끝내고 왔는데 도넛이 먹고 싶다니…


저리 가라고 쳐내면 더 큰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와 머리를 칠 뿐이었다. 머릿속 탁구대에서 듀스와 매치포인트를 반복하며 흥미진진하게, 갈수록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내가 어떻게 빵을 이기겠어…


집에 돌아온 지 30분도 안되어 주섬주섬 다시 외출 준비를 했다. 아르바이트하던 매장으로 돌아가기는 부끄럽기도 하고, 무슨 쩨쩨한 자존심인지 매출을 올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다른 매장에 가기로 했다. 하필 습한 여름날을 몇 배는 더 끈적하게 만드는 미스트 같은 보슬비가 내렸지만, 도넛 배 탁구 패배자는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혹시 도넛이 다 팔리면 어쩌나 걱정하며 목적지에 다다랐다. 늘 계산대 뒤에서 몰래 부럽게 손님들을 봐왔는데, 손님이 되어 당당히 도넛 두 개를 담았다. 기름에 튀긴 밀가루답게 도넛은 마음을 치유하기도 전에 즉시 기력을 채웠다.




입시 마라톤을 포기하고 싶었던 고등학생을 응원하고, 아침부터 이어진 고된 아르바이트로 온돌에 지지고 있던 무다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탄수화물의 힘.


365일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친 심신에 필요한 영양을 채우려는 뇌의 생존 본능 때문일 것이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단 맛이 당기고, 스트레스가 과다하면 매운맛이 당긴다고 한다. 배고파서가 아니라 스트레스로 먹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가짜식욕'.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음식을 먹게 만드는 다이어트의 주적이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 보자.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싶다. 얼마나 힘들면 뇌가 식욕을 만들어 격정적으로 신호를 보낼까. 가짜식욕이 아니라 지방을 쌓아두려는 인체의 알고리즘을 거스르는 다이어트가 생존의 주적 아닌가?


어느 쪽이든 먹기 위한, 혹은 안 먹기 위한 명분일 뿐이다. 오늘은 힘이 필요해. 일단 오늘은 행복해야 해. 매일이 어려우면 가끔이라도 행복해봐야 해. 뇌께서 그러라고 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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