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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빵의 추억 02화

바게트: 길게 오래가는

by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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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나간 옛 친구들을 떠올린다. 한 때는 없이 못 살던 그들이 떠난 구멍에는 궁금함만 빙빙 맴돈다.


하얗고 통통한 얼굴, 발그란 볼의 정윤이는 우리 집과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빨간 벽돌집 1층에 살았다. 지금은 발에 치이는 프랜차이즈 빵집이 퍼지기 전, 동네에 ‘뉴욕제과’라는 이국적인 이름의 큰 빵집이 있었다. 정윤이는 뉴욕제과 딸이었다. 뉴욕제과에 가면 하얀 새치가 빽빽한 더벅머리로 묵묵히 빵을 나르는 정윤이의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엄마가 뉴욕제과에서 빵을 살 때마다 정윤이의 아버지는 꼭 단팥빵이나 소보루빵을 덤으로 넣어주셨고, 간혹 크림빵을 주시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루는 뉴욕제과에 다녀온 엄마의 가방에 특이한 게 들어 있었다. 투명 비닐에 든 쫀득한 빵이 아니라 얇은 습자지에 담긴 길쭉한 빵. 이름은 바게트. 프랑스 사람들이 먹는 빵이라고 했다. 빵을 감싼 종이에서 밀가루의 톡톡하고 수수한 향기가 났다. 손을 데자 느껴지는 딱딱하고 거친 겉면에 당혹스러웠다가, 손으로 뜯어지지 않는 질긴 질감에 걱정하다가, 맛을 보니…



맛없어!



일반 빵의 몇 배나 되는 크기라 오래 먹을 수 있겠다는 만족감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엄마가 좋아한 어른의 빵 바게트는 동생과 칼싸움을 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다음 주에도 엄마는 어김없이 바게트를 사 왔다. 이번에는 친구를 달고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하얀 생크림이었다. 딱딱한 바게트가 어려웠던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뉴욕제과는 바게트를 사면 생크림을 같이 담아주기 시작했다. 대각선으로 슥삭 잘린 바게트를 생크림에 찍어 정윤이와 나눠 먹었다. 정윤이는 빵집 딸이지만 빵을 그다지 많이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생크림을 이길 제간은 없었는지 깔끔하게 먹었다.


주말마다 간식을 책임져주던 뉴욕제과는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았고, 정윤이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사 갔다고 했다. 나는 그 후로 정윤이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가 줄어들다 보니 회사에서 마음 맞는 동료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복이다. 민트 초코와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친해진 직장 친구 오드리의 초대로 취향이 빼곡한 벽의 복층 오피스텔에 여럿이 둘러앉았다. 집들이 겸 미리 크리스마스 파티라며 푸근한 앞치마를 두른 오드리가 환하게 웃으며 음식을 차례로 내주었다. 크리스마스라는 계절 특수성과 노란 불빛 조미료로 맛이 배가된 코스 메뉴 중 최고는 카프레제 토스트였다.


슬라이스 한 바게트 지반 위에 신선한 바질 모자를 쓴 방울토마토 군단이 도톰한 모차렐라 치즈 방석을 열 맞춰 밟고 있었다. 이탈리아 국기 같기도, 마르게리따 피자 같기도 했다. 카프레제 토스트의 주인공은 모차렐라 치즈도, 방울토마토도, 바질 잎도 아니고, 바게트였다. 바게트가 없었다면 평범한 카프레제 샐러드였을 이 음식은 바게트의 단단한 힘을 받았다.


음식의 곁다리로 나와 눈에 띄지 않던 바게트가 당당히 주인공 자리에 선 것을 보니 뉴욕제과의 생크림이, 그리고 정윤이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 참 좋았는데...

내가 이랬으면, 아니 저랬으면 우린 아직 연락하고 지낼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스스로의 행동을, 그리고 존재조차 모를 유령 같은 과오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본다. 쓴 물이 나올 때까지 씹다 보면 스스로를 향한 자책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자책은 곧 '너는 왜 나를 떠났지?' 원망이 되어 번진다. 크게 덮쳐오는 감정에 당황하여 황급히 불을 끈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이제 와서 모두 부질없다는 사실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장편 소설 같은 인생은 챕터로 나뉘어 있다. 소설 초반부에 정윤이는 S.E.S 라이브 앨범을 알려주고, 부모님 몰래 믹스 커피를 타주면서 나를 부모님 바깥의 세상으로 데려가준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정윤이의 이사를 기점으로 ‘정윤이와의 추억’ 챕터는 끝났고, 결말까지 함께 하리라 믿었던 정윤이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정윤이와의 추억’이라는 챕터가 있었던가 의심할 정도로 너무나 다른 챕터에 와있다. 궁금하기도, 두렵기도 한 뒷 이야기를 향해 페이지를 넘겨야 하기에 지나간 챕터에 매몰될 수 없다. 바게트에 생크림을 찍어 먹는 챕터를 놓아주어야 색다른 바게트 레시피를 얻을 수 있으니까. 요즘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생크림을 구하기 어려워 올리브 오일을 바게트에 덤덤하게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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