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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빵의 추억 05화

프레첼: 짠내가 풀풀 나는 맛

by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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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맛있다. K-피자, K-치킨, K-크루아상… 한국인 입맛에 맞췄으니 한국인에게 맛있는 것은 당연한 걸까?


검지와 엄지 사이에 쏙 들어올 만큼 작고 야무진 프레첼 모양의 과자를 처음 접했던 것은 다니던 대학교 앞의 어느 Bar였을 것이다. 와그작와그작 소리를 내며 씹으면 밀가루의 고소함과 미미한 단맛이 치고 올라온다. 장미 가시처럼 뾰족한 소금이 짠맛을 콕콕 혀에 찔러주니 맥주와 궁합이 좋을 수밖에! 유머라곤 없는 우직한 사람들이 모여 효율성을 토론할 것 같은 나라에서 온 프레첼이 K-겉옷을 걸쳤다고 한다. 공강 시간마다 학교 정문의 베이커리에서 빵을 나눠 먹던 데이지가 신나게 K-프레첼에 대한 간증을 쏟아냈다.


야... 진~~~~짜 맛있어!!
헐!! (우리의 이런 대화는 18년 동안 이런 식이다)


24시간 커피 체인점에서 파는 프레첼 얘기였다. 데이지 말로는 다양한 맛의 프레첼이 있고, 거기에 맞는 소스도 고를 수 있다고 한다. 그중 델리 프레첼과 체다 소스를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참을 이유가 없어 늦지 않게 카페를 찾았다. 진짜 있다. 고구마 프레첼, 옥수수 프레첼, 페퍼로니 프레첼...

데이지의 지시대로 델리 프레첼과 체다 소스를 시켰다. 프레첼이지만 프레첼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빵. 프레첼 같은 리본 모양도 아니었고, 프레첼처럼 딱딱하지도 않았다. 반달 모양으로 살짝 휜 말랑한 피자 도우는 정확하게 네 등분되어 있었다. 각 조각의 윗면은 봄날의 꽃 봉오리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공간 안에 햄이 살포시 누워있었고, 모차렐라 치즈는 따뜻하게 녹아 흐르는 이불처럼 햄을 덮어주었다. 한 조각을 떼어내자 저항하듯 늘어나는 모차렐라 치즈를 돌돌 빵에 감은 뒤 개나리 색의 체다치즈 소스를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욕부터 나온다고 한다.


야... 나 먹었어.. 미친....




*

누구는 유명한 이 기업에, 혹은 저 기업에 취업했다는데 취업을 못한 나는 졸업을 유예하고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학교 앞 자취방에서 본가로 돌아와 친구들과 멀어지니 마땅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우울한 꽃이 핀 20대의 날에 그나마 쬐던 빛은 집 근처 대학가에 그 프레첼을 파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은행 앱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통장에는 4,200원이라는 애매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델리 프레첼과 체다 소스를 먹기에 딱 몇 백 원 부족했다. 정말 딱 몇 백 원.


집을 샅샅이 뒤져보면 부족한 몇 백 원쯤 나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랍을 열어보고, 매일 들고 다니는 집기류가 담긴 쟁반도 들어보고... 어떻게든 범인의 체모 하나라도 찾으려 안달 난 탐정의 마음으로 온 집안을 훑은 자의 손에는 묵직한 오백 원짜리 동전과 빛이 바랜 백 원짜리 동전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았으니 4,200원은 계좌에, 동전으로 구성된 1,000원은 내 손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카페와 정반대 방향에 있는 은행으로 달려가 동전을 천 원짜리 지폐로 바꾼 뒤, 천 원을 계좌에 입금해 통장에 찍힌 금액을 5,200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 뒤, 거기서 15분을 더 걸어 카페에 도착했고, 그제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었다. 고상하게 시침을 떼며 델리 프레첼을 체다치즈 소스에 찍으며 축난 기력을 보충했다.

한 달 후인 그 해 가을, 취업을 했다.




*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여유롭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필요로 했던 몇 백 원을 과감하게 자체 절삭하고 카드를 내민다. 그럴 때면 잘 버텼다는 생각이 드는데,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쳐 거만해지기도 한다.


다양한 계급의 사람을 모아놓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금수저로 알려진 어느 출연자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베이징덕을 사주지 않아 울었다고 고백했다. 부유한 그녀에게 베이징덕은 원하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쥐가 나오는 집에서 어린 가장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다른 출연자는 베이징덕은커녕, 거기에 견주기 어렵도록 적은 금액을 손에 쥐고 있기 위해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저 사람은 성실하지 않은가 봐



힘든 시기를 착실하게 견뎠기에 쉽게 던지는 말. (나름) 바닥에서 올라왔다고 생각하기에 던지는 말. 하지만 뿌옇게 가려 있는 바닥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거긴 바닥이 아닐지도 모른다.


몸이 아파 거동조차 쉽지 사람들, 최소한의 투자도 어려운 사람들, 정보의 사각지대에 놓여 마땅히 받아야 할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베이징덕을 먹을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대학 입학까지 물적 지지를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김으로써 나 조차도 베이징덕을 못 먹었다고 불평불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너무 당연해서 무뎌진 안락함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함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만 해도 조금 더 배려할 수 있지 않을까? 까진 살갗에 약이랍시고 물파스를 건네면서 왜 고마워하지 않느냐 성내면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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