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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빵의 추억 03화

꽈배기: 시대를 관통하는 맛

by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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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매주 토요일 루틴은 엄마 손을 잡고 재래시장에 가는 것이었다. 교회 옆 가파른 언덕을 슬금슬금 내려가 신호등을 건너고, 무서운 치과를 지나 한참을 더 걸어 행인들을 삼키는 재래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반대편 출구를 찍고, 입구로 돌아오는 게 우리의 코스다.


상인들은 어두컴컴한 재래시장 안에서 동그란 전구를 켜 각자의 물건을 밝혔다. 한 품에 안기지 않는 커다란 드럼통이 진열대를 대신했다. 빨간색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긴 흙 묻은 채소, 바랜 시루에 빽빽한 콩나물, 네모난 식용유통에 푸딩처럼 담긴 선지 따위는 관심사가 아닌지라 심드렁하게 시선을 던졌다.


시장에서 내가 좋아한 장소는 딱 두 곳이다. 하나는 시장 중간에 오아시스처럼 자리한 공판장이고, 또 하나는 시장 끄트머리의 꽈배기 가게다. 시장의 출구에 있어 절반만 햇볕을 받는 꽈배기 가게는 거부하기 어려운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겼다. 구불구불한 꽈배기를 필두로, 안은 텅 비어도 쫀득한 피가 매력인 찹쌀도넛, 하얀 앙금이 든 단단한 생도넛이 자외선을 막으려는 듯 하얀 설탕을 두껍게 바르고 성긴 진열대에 누워 기름을 빼고 있었다. 생김새도 아름다운 꽈배기는 매주 먹어도 먹고 싶었지만, 소심하게 사달라는 말은 못 하고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채주기를 바랐다. 꽈배기가 담긴 기름진 봉투를 까만 봉지에 넣어 룰루랄라 집에 돌아간 날도 있지만, 엄마가 관심 없이 홱 유턴할 때면 혼자 뚱해져 씁쓸히 길을 걸었다.




*

직장을 다니며 자취하던 집 근처에도 재래시장이 있었다. TV에 몇 번 소개될 정도로 꽤 유명한 시장이었는데, 왠지 들어가기 부담스러워 조금 더 걸어서라도 마트로 향했다. 그런 나의 발목을 잡아당긴 곳이 있었으니, 바로 꽈배기 가게다. 어린 시절 매주 가던 시장의 꽈배기 가게와 똑같이 시장 끄트머리에 꽈배기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다. 30여 년이 흘러도 꽈배기와 팥 도넛은 여전했지만, 모차렐라 치즈가 주욱 늘어나는 치즈볼과 핫도그, 고로케가 찹쌀 도넛과 생도넛의 자리를 대체했다.


혼자 사는 입 짧은 여성 주제에 꽈배기 3개, 치즈볼, 팥 도넛까지 담아 카드를 긁었다. 집에 오자마자 꽈배기를 입에 넣었다. 변함없는 아는 맛에 감탄하며 꽈배기 하나, 치즈볼 하나만 먹고 종이봉투를 고이 접어 두었는데, 다음날이 되니 야심 차게 묻혔던 설탕은 어디로 증발됐는지 보이지 않고, 쫀득했던 빵은 거짓말처럼 딱딱해져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회복되지 않았다.


헐…


미련 없이 남은 빵들을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넣었다. 와, 정말 성공한 어른이잖아?




꽈배기를 먹은 집은 방과 부엌이 분리된 분리형 원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의 꼭대기 층이라 생수를 주문하기 부담스러운 단점이 있었다. 엄마가 본가에 있는 책을 가져다주러 왔다가 왜 이런 집을 구했냐고 속상해했지만 주위가 막히지 않아 해가 잘 드는 장점이 더 컸다. 특히 저녁 다섯 시쯤 기울어진 해가 만들어낸 빛 조각이 방 안의 작은 화분을 비추는 게 좋았다. 침대에 누워 점점 사라지는 빛 조각을 바라보면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무용해 보였다.


슈퍼 싱글 침대, 붙박이 장, 책상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나면 네모난 러그 위가 나에게 허락된 생활공간이었다. 좁고 불편해도 내가 직접 부동산을 돌며 결정하고, 온전히 내가 번 돈으로 유지할 수 있는 집이 자랑스러웠다.


어른의 허락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어린이가 자라서 직접 결정을 할 때, 특히 그 결정이 돈을 쓰는 것일 때, 성공한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일본 여행에서 우연히 들른 포켓몬 샵에서 포켓몬 인형을 잔뜩 살 때, 커다란 일회용 컵 가득 구슬 아이스크림을 담아 먹을 때, 운전하고 영화관에 가서 혼자 영화 볼 때. ‘나 꽤 잘 살고 있구나’ 라며 우쭐댔다.


걱정거리 없이 밤늦도록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어른인 내가 좋다. 신용을 걸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책임이 따르지만 또 그만큼의 자유와 권한을 쥐게 된다. 어른이 꽈배기 사주기를 눈치 보며 기다릴 필요도 없다.



- 설탕 묻혀드릴까요?

- 네!



꽈배기에 설탕을 잔뜩 묻히듯, 별 거 아닌 치료제로 고장 난 부위를 조금씩 손 보면서 살다 보면 어른으로 사는 것도 꽤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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