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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윗리윗 Aug 31. 2022

흩어짐을 그러모아 만드는 다면적 세계

리윗-리윗 인터뷰#6 : 임선구 작가

임선구 Sun Goo Im
작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 학사 및 석사과정 졸업 후 시각예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진행한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2020), 갤러리 조선 《종이 위의 검은 모래 》(2019) 등이 있으며, 신한갤러리 《Touch Stone》(2022), 두산갤러리 《두산 아트랩 전시》(2022), 학고재 갤러리 《아이콘》(2021) 등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인스타그램 @sun9o0

임선구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인물의 다면성을 포착하고, 드로잉을 통해 화폭을 조성한다. 가족과 지인들이 얽히고 설켜있는 특정 공간에서의 사건, 주변을 굴러다니는 사물과 무심코 조우한 순간, 기억 저편에 있던 장면들이 한 폭의 종이 위에서 솟아나고 공생하며 화면을 구성한다.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그림 속 도상들은 그것을 소환하는 작가의 기억을 공통분모 삼아 모여든다.


평화롭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은 일상이 쌓여서 입체적인 이야기를 형성하고,
그것들이 시선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기억의 파편을 깁고, 구기고, 콜라주 하며, 작가는 연약하고도 사소한 풍경이 모여서 이루는 세계의 다면성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종이, 흑연, 모래와 같이 변형되거나 흩어지기 쉬운 물성을 지닌 재료들은 이것을 화면에 끌어모으는 작가의 행위와 만나, 그림 속 세계의 은유로 작용한다. "우리가 같이 앉아 있는 이 순간도, 속으로는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작가는 웃어 보였다. 그가 그려낸 세계에서 저마다의 이야기가 꿈틀댄다.


임선구 작가의 작업실 풍경 ©임선구

인터뷰에 앞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삶의 언저리에 흩어져 있는 단어들을 모아 드로잉의 어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경험 안에서 외부 세계의 단면을 발견하고, 방랑하던 서사들이 유기적으로 공생하도록 화면을 조율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낍니다. 종이와 흑연이라는 매체로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는 관계, 부서지고 구겨지기 쉬운 것들, 곧 사라질 법한 대상들을 모아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로 개인적인 기억의 파편을 드로잉으로 서술하고 계시는데, 드로잉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와 작업 과정에 대해 설명 부탁드려요.

저는 회화 작업보다는 글쓰기나  얘기를 나열하듯 빠른 속도로 그리는 방법에 흥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게 가장 친숙한 종이와 연필낙서하듯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 연필로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긋기와 비비기, 지우기 정도의 단순한 사용법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속도감 있게 표현하는데 집중했어요. 그렇게 드로잉을 지속하다 보니 흑연이라는 매체에도 집중하게   같아요. 그리는 순간 부서지며 흩어지는 특징과, 조율 방식에 따라 다양한 온도와 느낌으로 다가오는 연필 색을 작업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을 지속했죠. 매체와 친근해지는 과정을 지속하며 드로잉을 기조로 다양한 실험을 해나갔어요.

작업 과정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우선 소재를 곱씹으며 낚아 올리는 과정을 거쳐요.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서 대상을 보잖아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미지가 이상한 형태로 불어나고, 그것들을 조율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낀 것 같아요. 여러 이미지 사이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방식이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정사각형 드로잉 시리즈>, (2017-2018). 종이에 흑연 각 30x30cm.  ©임선구


흑연, 모래, 종이 등의 재료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보통 제가 겪은 상황들에서 작업을 시작하곤 하는데, 무언가를 다룰 때 너무 무거운 책임감과 감정들이 따라오면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던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기초적인 재료’와 ‘가벼운 행위’가 매체를 선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했어요. 저의 그림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이나 사물이 서로 얽혀 있는데. 얇고, 가볍고, 흩어지는 속성을 가진 재료가 나로 인해 화면 안에서 단단해지는 과정이 그림 속 세계와도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흑연은 종이 표면을 긋는 순간부터 흩어져요. 모래 역시 흩어지는 성질을 가졌죠. 또, 종이는 나풀거리지만 너덜거릴지언정 잘 찢어지지 않는 이상한 견고함이 있어요. 사소하게 여기지만 겪어봤을 때 의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종이와 연필 같아요. 저는 이러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파편화된 것들을 끌어모아 고정하는 방법을 연구해왔습니다.


화면 전체가 다양한 이미지로 가득하고, 응축된 감정이 몰아치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림을 구상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지점이 있으신가요?

커다란 면이나 선 안에 제가 겪은 상황에서 비롯된 도상들을 끼워 넣는 행위가 저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제 그림 중 인물 사이를 가로막아버리는 구조를 배치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 인물들이 화면에서 주인공처럼 보이게 하기가 싫었기 때문이에요. 내 삶에서도 이 사람들이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제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물들을 일부러 난처한 환경에 풍덩 빠뜨려놓고 가지고 노는 행위를 했다고 생각을 해요.

요즘에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마주쳤던 것들이 저로 인해 한 공간에 모였을 때 생기는 풍경을 생각하고 작업을 해요. 최근의 이미지부터, 오래돼서 가물가물한 것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머리만 숨고 자신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동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제 모습 같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만큼 작업 안에서는 저 자신을 무책임하게 펼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 것 같아요. 저는 이미지를 그리는 것보다 여러 도상들이 펼쳐져 있는 화면을 조율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요. 어떤 부분을 가리고, 어떤 부분에 다른 물성을 올릴지 조율을 할 때 제일 재미있어요. 제가 구상하고 싶은 구도를 완성했을 때 감정이 가라앉는 순간이 제일 좋아요.

<우리는 검은 산 구석에 모여>, (2019). 종이에 흑연, 혼합재료, 98x150cm.  ©임선구


'성인을 위한 동화책'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작품 속 이미지가 담고 있는 서사가 궁금합니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족과 관련한 이야기를 제일 많이 그렸어요. 각자 집에 대해 가진 이미지가 있잖아요? 누구나 겪을 법한 상황이지만, 특정한 날이면 가족들이 다 같이 어느 산에 올라가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제겐 우습고 기괴하게 느껴지곤 했어요. 이를테면 가톨릭 집안이라 늘 참여해야 하는 산소 앞에서의 미사, 그 옆에서 다른 소원을 빌며 돌탑을 쌓아 올리는 동생들, 그 옆을 날아가는 나비를 보며 할머니가 오신 거라고 이야기하는 어머니. 이런 장면들이 마치 맥락이 다른 책들을 가져와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상황 같았거든요. 제 그림에는 보통 여러 세대의 인물들이 뒤엉켜 있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이렇듯 미묘하게 서로 뒤엉키는 상황과 복잡한 인간상을 이해하고자 작업 안으로 끌고 들어온 다음, 그에 대한 제 감정을 추적해가며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하나의 신념보다는 각자의 믿음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삶의 다각화된 면을 작업으로 가져오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색채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지는 않았고, 오히려 제 경험에서 비롯한 포착을 작업에서 풀어내는 게, 개개인의 감상 지점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산은 무너지느라 돌을 떨어뜨린다>, (2021). 종이에 흑연, 콜라주, 혼합재료, 각 280x150cm 중앙 300x150cm ©임선구
<산은 무너지느라 돌을 떨어뜨린다>_디테일컷, (2021). ©임선구


그림을 출판이나 애니메이션화 하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부모님께서 두 분 다 출판사를 다니셨어요. 유년기에는 방 하나가 책으로 가득 차있었죠.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 만드는 일을 작업을 정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검은 모래』(2019) 드로잉 북은 제가 그린 도상들을 오려낸 뒤 짧은 글을 붙여 만든 동화책이에요. 도상을 배경에서 분리하면 다른 세상에 떨어져 나오는 게, 마치 제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행위가 나중에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연결된 것 같아요.

2020년에는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애니메이션 전시를 했어요. 그동안은 파편적인 장면에 각기 다른 제목을 붙여서 드로잉을 했다면 이번에는 한 장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어요. <숨은 산>은 제가 오르던 선산에 대한 이야기를 물감과 흑연이 만났을 때의 효과를 관찰하며 그린 연작 드로잉인데, 이것을 애니메이션화 했어요. 산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 예를 들어 신부님은 미사를 드리는 중이고 저희는 옆에서 돌을 쌓고 있는 장면 등을 그렸어요. '하나의 산을 오르는 데에도  많은 길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생각을 작업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로 다른 비율과 이미지를 가진 네 개의 화면을 펼쳐 놓았죠.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이것을 연결 지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정 시간이 되면 새가 네 개의 화면을 관통하여 날아가고, 튀어 오른 돌멩이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는 연극적인 요소를 부여했어요. 기법적으로 아쉬운 지점도 있지만 애니메이션은 저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 작업이에요. 지금은 작업을 할 때 움직임이라는 요소에 대해 적극적으로 염두하게 되었어요.

(좌)_<숨은 산 3>, (2020). 드로잉 애니메이션, 반복 재생, Ed. 1/5, (우)_『숨은 산』,(2019). 밀푀유 타임라인,  ©임선구


최근 신한갤러리에서 진행한 《Touch Stone》(2022) 전시에서는 과거의 작업들을 찢어 콜라주 하셨는데요. 종이를 찢고 붙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매체에 대한 관심이 흑연에서 종이로 옮겨갔다고 얘기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한 번은 작업실에 그림들이 겹쳐 쌓여 있었는데 제가 제 작업을 못 알아본 거예요. ‘살짝 구겨졌을 뿐인데, 이것을 다른 면으로 인식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접었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길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렇게 여러 가지 상상을 펼쳐나가다가 종이를 접으면 산 아래에서 무덤 안에 있는 사람의 손까지 한 번에 닿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연결됐어요. 그래서 종이에 변형을 가하는 것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콜라주 작업의 시작은 우연적이 었어요. 어느 날 그림이 찢어졌는데, 액자에 못 넣을까봐 걱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종이를 접고 구기는 행위가 드로잉에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은 해소하지 못하는 갈등에서 기인한 지점도 있고, 작업 형식을 확장하려는 움직임과도 연결되어요.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시선을 한 화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이때 생기는 이야기들이 다음 작업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콜라주 작업들이 하나의 과정처럼 느껴져요. 앞으로는 어떤 세계를 계속 분할시키는 작업과 드로잉의 스케일을 확장하여 종이가 공간을 구성하는 작업 두 가지 방식을 병행하고 싶어요.


<두번째 샛길>,(2022). 종이에 연필 드로잉, 콜라주_61x58x8cm. *최대크기 ©임선구
작업과 함께 서 있는 임선구 작가 ©임선구

최근의 관심사를 소개해 주세요.

요즘 제게 큰 힘이 되는 건 라디오예요. 아침 산책을 나가면서부터 라디오를 생각해요. 마치 친구가 찾아와 말을 해 주는 것 같아서, 라디오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들뜨기 시작하죠. 요즘은 보이는 라디오를 많이 하잖아요? 예를 들어 우주 코너를 하면 우주 사진도 보여줘요. 그럼 작업하다 말고 아이패드로 뛰어가서 검댕이 묻은 얼굴로 연필 쥐고 한참 보다가, 다시 작업하고 그래요.(웃음)


그림에서 다양한 존재와 작가님의 내면세계가 엿보입니다. 어떤 세상을 그리고 싶은가요?

제가 그리는 세계관이 한 가지 맥락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상황 안에 내가 좋아하는 면과 싫어하는 면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것처럼, 애정을 가지는 것을 작업으로 가져올 때 불편한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없는 것처럼요. 두 번째 개인전의 제목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2020)처럼, 평화롭지도 그렇다고 마냥 혼란스럽지도 않은 일상이 겹겹이 쌓여서 입체적인 이야기를 형성하고, 그것들이 시선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읽힐 수 있는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임선구 개인전, 《보이지도않는꽃이 : 발자국을 발견하기》 전시 포스터(2022)

올해 두 건의 개인전을 앞두고 계시는데요, 앞으로의 계획 소개 부탁드립니다.

8월 말에는 세마창고에서 전시를 할 예정이에요. 이상의 시 <절벽> 마지막 싯구 ‘보이지도않는꽃이’에서 제목을 따왔어요. 이 시의 화자는 무덤에 누워 있는데, 은은한 꽃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막상 꽃은 등장하지 않죠. 저는 이 문장 안에 누군가의 삶이나 죽음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녹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작업 속 도상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라짐을 연상케 하는 꽃 향기를 향해 화자가 나아가는 과정이 제가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과 맞물린다고 생각했어요. 또 세마창고가 근대 건축물이잖아요. 나무 골조가 마치 큐브처럼 느껴져서, 육면체 안에 드로잉을 연출해서 그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체감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도상들이 3차원으로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공간 안에 그림을 그리는 거죠.

11월에는 드로잉 룸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어요. 얼핏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시공간이 꺾이고 전복되는 화면을 실험해 보고 있어요. 여러 서사로 읽힐 수 있는 작업을 좀 더 정제된 방식으로 선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Credit

기획 / 인터뷰 | 리윗-리윗(이재화 이현경)

편집 | 이재화

자료제공 | 임선구

문의 | leewithx2@gmail.com

인스타그램 | @leewith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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