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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May 18. 2024

사나기지마 혼밥 일기, 카레

추천곡: 프롬 <달의 뒤편으로 와요>

관계를 쌓아가거나 어떤 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단 한 가지라도 어긋나거나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면, 전부 포기하고 싶어지는 못된 심보가 있습니다. 품고 가고 싶지 않은 거슬리는 오점이 생겼으니, 차라리 처음부터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학창 시절에는 공책에 필기나 필사를 하다가 한 글자라도 틀리면 전부 찢고 처음부터 시작하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뚜렷해지는 건 내가 한없이 부족하고 못났다는 깨달음밖에 없어서, 완벽주의적인 성향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타고난, 혹은 어린 시절에 자리 잡은 성향은 잘 바뀌지 않는 모양입니다. 개정판 작업에서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그냥 다 포기해 버릴까’ 싶기도 했고, 어떤 관계는 직면하기보다 멀리 도망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피도 능력인데, 저에게는 지금 만한 선택지가 세계 어디에도 드물어서, 버틸 수밖에요.


다카마쓰에서 4박 5일간의 일정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지금 이 편지는 도쿄로 돌아가기 전, 여행에 온전한 하루를 할애할 수 있는 나흘 째에 쓰고 있어요. 쇼도시마와 사나기지마 중에 고민했습니다.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에 쇼도시마에 위치한 시설은 올리브 공원 밖에 소개하지 못했는데, 사실 소면이나 간장이 유명해 견학과 체험 시설도 풍부하고, 영화 <스물네 개의 눈동자>를 재현한 마을과 로프웨이가 다닌 간카케이, 밀물과 썰물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엔젤로드 등 다룰만한 콘텐츠가 많거든요. 단, 섬이 넓고 올리브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아 관광버스가 아니면 주요 관광지를 한 번에 돌아보기 어렵습니다.


고민하다가 다른 후보였던 고양이 섬, 사나기지마에 가기로 했어요. 다카마쓰항이 아닌 다도쓰항에서 출발해 한 시간 남짓 바다를 가르면 나오는 자그마한 섬입니다. 관광객을 위한 시설은 카페와 식당을 겸한 호텔 하나뿐. 그 흔한 매점도 없어요. 혼자 발버둥 쳐도 풀리지 않는 관계와 일에 대한 고민 탓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냥 좋아하는 고양이를 보여 치유받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자세한 이야기는 원고에서 다룰 테니, 결론만 말씀드릴게요.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사람들이 보든 말든 아무 경계심 없이 낮잠이나 자는 고양이, 한 번도 미움받지 않은 듯 강아지처럼 따라와 간식을 달라고 자리를 잡고 앉는 고양이, 제방에 앉으니 폴짝 뛰어와 옆에서 온기를 나눠주고 잠시나마 함께 산책해 준 고양이. 도심에서 사람을 보면 놀라 달아나고, 날카롭게 쏘아보는 고양이와는 달랐어요. 어느 쪽이나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죠.



섬에서 밥을 먹을 곳은 한 군데밖에 없어서,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이 사이좋게 모여 밥을 먹었답니다. 아, 식사 메뉴도 스파이스 치킨 카레 하나예요. 매콤함 카레와 향 그윽한 커피가 잘 어울렸습니다.



네코노시마 호스텔
주소: 香川県仲多度郡多度津町佐柳1353
인스타그램: neconoshima_hostel
홈페이지: https://neconoshima.jp


이날의 주제곡은 프롬의 <달의 뒤편으로 와요>. 혹시 모든 일이 엉망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숨거나 나를 고립시켜야 할 때 이런 곳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달의 뒤편으로 와요
그댈 숨겨 줄게요
달의 뒤편으로 와요
둘이서 눈을 감게요
조금 슬퍼지고 비틀대어도
아무도 모르는 곳
달의 숲으로 와 빛을 가져요


더 많은 이야기와 사진은 유월에 출간될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개정판에서 확인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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