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남극해'가 보였다.
Bullsbrook 와인 농장에서의 일을 끝낸 뒤, 우리는 여러 농장을 돌아다니며 포도나무 다듬는 일을 이어 나갔다. '대농장'이라 불릴 만한 Fini Olive Farm에 갔을 때,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농장의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기도 했었고, 고목(枯木)처럼 보이는 40년이 넘은 포도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농장에서 일을 하며 이 나무에 열리는 포도로 만든 와인은 어떤 맛일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드루먼의 지시로 여러 농장들을 전전하던 우리는 '마지막' 와인 농장이 될 '도넬리리버 와인 농장(Donnelly River Wine Farm)'으로 향했다. 그곳은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인 호주 서남부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km, 퍼스(Perth)에서 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팸버튼(Pemberton)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넬리리버 와인 농장에는 와이너리(Winnery)와 소믈리에가 있었다. 소믈리에가 와인잔을 건네며 설명을 곁들여 주는 '와인 농장'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큰 농장이었다. 평지와 골짜기, 언덕과 산비탈 등에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나무가 자라는 위치에 따라 와인의 종류가 달라진다고 했다. 주로 언덕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농장이었기에 이동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보다 우리를 괴롭게 한 것은 '날씨'였다.
농장 언덕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남극해'가 보였다. 그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모진 바람은 시커먼 구름을 몰아 왔고, 세차게 비를 뿌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비바람이 한바탕 몰아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태양이 내리쬈지만, 2-30분 정도만 지나면 또 구름들이 몰려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고 태양이 내리쬐는 날씨의 무한 반복이었다. 잠깐 동안 내리치는 비바람은 어찌나 격렬한 지, 가끔은 포도나무가 뽑혀 나가기도 했고 심한 날은 밑동이 1미터가 넘는 나무가 쓰러진 일도 있었다.
9월 중순, 우기가 끝나갈 무렵이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날씨는 더 엉망이었다. 농장주는 날씨가 따뜻해 지기 전, 최대한 빨리 모든 포도나무를 다듬고 싶어 했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비가 내리면 일을 할 수 없다. 기계에 빗물이 들어가면 고장이 날 가능성도 있었고 무엇보다 비를 맞으면서 일을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건강을 해치는 일이었다. 다른 농장에서 일을 할 때는 한 번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한, 두 시간 이상씩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비가 오는 날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도넬리리버 와인 농장에서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일하던 것을 멈추고 농장 숙소(farm accommodation, 농장 안에 위치한 숙소)로 돌아왔다. 문제는 숙소로 돌아오고나면 비가 그친다는 것이었다.
비가 그친 후, 숙소에서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하지 않고 쉴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나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가자"라고 말했고, 마크 형은 "나가지 말자"라고 말했다.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도 2-30분만 있으면 금방 그친다. 그러니 조금 힘들더라도 일을 하다보면 비가 그칠 것이니, 최대한 많은 일을 하고 돈을 더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마크 형은 반박했다.
"비를 맞으면서까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우기가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비도 점점 적게 내릴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해야할 일의 양은 정해져 있고, 결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돈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굳이 그 일을 빨리 끝낼 필요는 없다."
도넬리리버 와인 팜에서는 일을 한 시간만큼 돈을 받는 것(시급)이 아니라, 나무를 다듬은 개수(양)에 따라 돈이 계산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일을 할 수록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야 했고, 최대한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일을 하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두 명 더 있었고, '천천히 일을 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마크 형을 포함해 3명이었다.
결국, '비가 와도' 일을 하러 나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일을 하는 것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쌓여 가기 시작했다. 일을 하러 나가자고 주장을 한 '나'와 '리더 형(스티브)'은 평균 속도 이상으로 일을 해냈기 때문에 '일'에 관해서 다른 멤버들의 불만이 제기되지 않았지만, 평균 속도에 한 참 못미치는 '유 형님(내가 처음 퍼스에 왔을 때 만난 형님)'에 대한 불편함과 불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6명이 한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가 일을 빠르게 많이 하거나 천천히 적게 해도 돈은 '똑같이(1/6)' 받고 있는 상태였고, 그동안 일을 평균보다 적게 하는 것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지'라며 좋게 넘겨 왔던 것들이 이제는 '왜 혼자만 계속 편하게 일하려고 하느냐'라는 불만으로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극한의 노동 환경. 쾌쾌한 냄새가 나는 비옷을 걸쳤지만 빗물은 옷 안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비가 내릴 때면 추위에 떨어야 했고, 해가 뜨면 땀을 뻘뻘흘리며 작업을 이어가야 했다.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올 때의 뿌듯함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 즐거움은 예전같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농장의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드루먼으로부터 '다음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뭔가, 정리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앞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