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농장.

미지에 싸인 신비의 섬이 드러나듯.

by LC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행복했다. 일을 한다는 그 자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라기보단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에 대한 희망에서 오는 행복. 일을 하면서 얻은 것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생활에 안정이 찾아왔고 농장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었다.




내가 호주에서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와인 농장에서 포도나무 가지를 다듬는 일이었다. '푸르닝(pruning)'이라고 부르는 이 일은 수확이 끝난 뒤 가을, 겨울 동안 마구잡이로 자라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나무를 말끔하게 다듬는 일이었다. 일을 구하기 전 호주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로부터 푸르닝이 농장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에 속한 것이고, 후유증이 남는 일이라서 웬만하면 피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여자들이 하기에는 힘든 일이며,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후유증 때문에 오랫동안 손가락 물리치료를 받기도 했다).


열심히 일했다. 농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Hard worker'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열심히 하는 나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팀 아월리(Team Hourly)로 일했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은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나는 평균 속도보다 빨리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팀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IMG_1402.png 퍼스 북쪽의 작은 마을 Bullsbrook. 그곳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더 가야 농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쯤에서 첫 번째 와인 농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고, 이런 멋진 풍경을 가진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 7시, 우리는 숙소를 떠난 우리는 우거진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30분 정도 차를 몰았다. 낮은 산과 언덕에 둘러 싸인 와인 농장 앞에는 냇물이 흘렀고, 물가 주변에는 야생 오래들이 노닐고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있다. 포도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캥거루. 언덕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여유로움. 구릉 너머의 햇살이 조금씩 농장으로 스밀 때, 농장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안개는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황금빛 햇살의 진격. 그제야 사라지는 안개들. 미지에 싸인 신비의 섬이 드러나듯 농장은 완연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풍족했다. 가장 큰 것은 마음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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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이야기

- I've got a job.

- 끝자락에서.

- 욕심이 무너뜨린 신뢰

- 외국인 노동자로 가는 길.

- 첫 월요일의 희망은 곧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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