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다치다.

합법적인 외국인 노동자

by LC

호주의 겨울, 남서부 지역 농장 일거리는 대부분 포도나무 푸르닝(Pruning)이었다. 특히, 마가렛 리버(Magaret River)를 포함한 주변 지역의 와인이 유명한데, 그 영향으로 퍼스 주변에는 크고 작은 와인 농장들이 많이 있었다. 나 역시 여러 와인 농장을 돌아다니며 포도나무를 다듬는 일을 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비치는 날이었다. 겨울이라지만 10도 안팎의 기온이 유지되고 있었고, 그날의 따뜻한 햇살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2주가 흘렀다. 이제는 기계를 이용해서 포도나무를 다듬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작업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피융- 피융- 피융- 피융-


공기 압축식 가위를 누를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잘려 나갔다. 잔가지 굵은 가지 할 것 없이 다 잘라야 했고, 작업의 속도를 높여 나갔다. 그때였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 쥐었다. 작은 나뭇가지들이 잘려나가면서 가끔씩 얼굴에 부딪히는 일이 있긴 했는데, 이번에는 정확히 눈을 강타한 것이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고, 굳게 닫힌 눈 커플 사이로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모두 작업을 멈추고 나에게 달려왔고, 우리 팀의 리더 스티브 형님은 드루먼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10분 정도 지나자 겨우 눈을 조금 뜰 수 있었다. 눈이 따가웠고 모든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좀 더 안정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상태로 일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거울에 비친 눈을 보니 동공 옆 흰자 부위에 붉은색 스크래치가 보였다. 동공이 찢어진 것일까, 나는 걱정이 앞섰다.


드루먼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2주. 내가 2주 동안 모은 돈은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 표를 사고, 남은 돈으로 겨우 10일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정도였다. 혹시나, 눈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어렵게 구한 일인데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약, 한국에 가게 된다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으로 미국이라도 잠깐 갔다 와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이 상태로도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호주에서의 병원비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온갖 상념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드루먼의 차가 농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눈에 빛을 비추며 이곳저곳 살폈다. 눈 안에 액체를 넣고 닦아내기를 여러 차례, 눈을 떠보라는 의사의 말에 눈을 떠 보니, 한결 깔끔해진 느낌이었다. 의사는 눈 안에 연고를 바르라고 했다. 연고를 눈에 바르고 눈을 깜빡이면 연고가 눈 밖으로 밀려 나왔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의사는 3일 뒤에 다시 병원에 오라고 했다.

치료를 받는 내내 병원비를 걱정했다. 일반 진료비 100달러. 메디케어(Medicare)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 무거운 마음으로 계산대 앞에 섰다. 하지만 계산대에서 돌아온 말은 "이미 결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라, 난 분명 결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병원비는 '직장 의료보험'으로 처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일을 하다가 다친 것이었고, 근무 중 상해 처리가 되어 드루먼이 결제하고 회사에 청구를 한다는 것이었다.


맞아, 나는 합법적인 외국인 노동자였잖아.

농장으로 돌아와 그늘이 드리운 나무 아래 누웠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이었다. 병원을 다녀와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병원비를 내지 않았던 것도, 오늘 하루를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의사에게 눈의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의사가 "No problem"이라고 말하면서 내일부터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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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이야기

- 첫 번째 농장.

- I've got a job.

- 끝자락에서.

- 욕심이 무너뜨린 신뢰

- 외국인 노동자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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