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꼭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금요일이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잡 에이전시에 들렀지만 여전히 일이 없다는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었다. 힘이 빠졌다. 통장의 잔고도 바닥이 났다. 지원서를 넣었던 수 많은 공장들. 그들은 내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금요일에 면접을 보고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더 이상 기회는 없었다. 끝이었다.
일을 구하러 돌아다닐 힘도, 의욕도 사라져버렸다. 치솟는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블루캣(Blue Cat. 퍼스 시티의 무료 버스)을 타고 스완 강가(Swan River)로 갔다. 강가 벤치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다음 주까지 안 되면, 한국으로 갈까. 한국 가서 몇 달 돈 벌고, 미국 여행이나 할까. 내가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하지. 지금까지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다들 여행은 잘 하고 있을까.
전화기가 울렸다. 퍼스에 처음 왔을 때 만난 형님이었다. 그 형님은 간간이 가구를 옮겨주거나 이사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일손이 부족해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가구 매장에서는 가구 '판매'만 할 뿐 배송은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구 구매자가 '배송할 사람'을 따로 고용하거나 본인이 직접 옮겨야 했다). 할 일이 없었던 나는 형님의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가구를 옮기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그때였다. 이게 웬일일까? 4시 30분이면 문을 닫는 잡 에이전시에서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뭐지? 설마..!?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Hello, this is LC speaking."
"Hi, LC"라는 말로 시작하는 밝은 목소리. 지금 당장 잡 에이전시(Aussie job, 지난번 정색을 했던 곳과 다른 곳이다)로 올 수 있냐는 말. 에이전시의 매너저는 퇴근해야 하는데 갑자기 한 농장에서 사람을 구해달라는 연락을 받아서 급하게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퇴근해버리겠다는 농담조의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겠다고, 나를 꼭 기다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일자리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희망. 나는 형님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우리는 흥분한 상태로 차를 몰아 시내로 향했다. 퍼스 근교(South Perth)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은 차들로 꽉 막혀 있었고, 나는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에이전시의 그녀는 웃으며 나를 반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제 겨우 퇴근할 수 있겠네."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장. 일에 대한 내용(와인 농장 푸르닝)과 일하러 가게 될 곳의 전화번호와 주소. 준비물과 임금이 적힌 종이였고, 그녀는 종이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일 12시에 여기 적힌 이 주소로 찾아가면 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전화해."
그녀는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Good Luck."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렇지만, 지난번처럼 펑크가 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모든 것은 내일 결정될 것이었다.
앞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