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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May 12. 2024

다 실프다

는 이제 그만하렵니다.


*실프다(제주도사투리) : "싫다"의 제주도 방언.  

귀찮다, 하기 싫다라는 의미로 많이 쓰임.


 


나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다. 햇빛이 쨍한 날은 유리창을 활짝 열고, 대청소하는 걸 즐긴다. 종일 비가 내리면 커튼 친 거실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로맨스영화를 보거나, 90년대 발라드를 들으며 청승떠는 걸 좋아한다. 날씨는 매일 바뀐다. 그리고 나는 슬펐다가 좋았다를 반복한다. 웃다 울기도 하고, 울다 말고 밥을 먹기도 한다. 그게 나다.


 


 


24년 제주의 봄은 봄이 아니었다. 흐린 날이 많았다. 비 오기 전에 삭신이 쑤신다는 어른들을 따라가긴 멀었지만. 축축 몸이 처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먹은 솜처럼 기운 없이 지냈다.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뭔가 불만을 가득 품은 채 아무것도 안 하는 무거운 구름을 보며 살다 보니 가슴도 덩달아 답답해졌다.


 


이 모든 것은 핑계다. 그냥 다 실픈 거다. 글 쓰는 것도, 책 읽는 것도. 시어머니에게 예쁘게 대답하는 것도, 남편의 말에 금방 반응하는 것도 실프다. 청소도 실프고, 설거지도 실프다. 알약만 먹어도 된다면 밥도 안 하고 싶다.


실프다. 그냥 다.


 


하지만, 실픈 티를 내면 안 된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나는 어른이다. 세 아이의 엄마다.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한다.


 


토요일 오전 영재수업에 갔다 온 아들이 차에 타자마자 아프다고 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는 것이다. 침을 삼킬 때 목도 따끔하다고 해서 감기인가 했다. 빨리 점심을 먹고, 2시에 수영강습에 가야 하는데, 수영 갔다 와서 잠깐 쉬고 5시 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바이올린 앙상블연습이 있다.


 


아들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열은 없었다.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시켜줬는데, 사골국물에 밥을 말아 몇 숟가락 뜨더니 입맛이 없다고 했다. 생각을 해야 한다.


 


세 아이를 키운다는 건 세 갈래로 뻗어가는 생각을 정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나마 두 아이가 밥을 잘 먹어서 다행이었다. 큰아이에게 수학학원에 걸어가라고 말하고,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오빠가 아프든 말든 수영장에 데려다 달라는 막둥이를 달래느라 핸드폰을 쥐어줬다. 언제부턴가 핸드폰게임은 만능해결사가 됐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40분 기다려 진료받고, 약을 타서 집에 왔다. 약을 먹이고, 재웠다. 수요일에 1박 2일 인성수련을 갔다 오고, 유도승단시험 보느라 긴장해서 잠을 잘 못 잤던 아들을 꼭 껴안고 재웠다. 두 시간 정도 잤을까. 바이올린까지 안 가면 안 되냐고 묻는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다음 주 공연이 있다.


 


네가 만일 바이올린 연습을 가지 않고 집에서 누워 있어도 마음이 엄청 불편할 거야. 그런데 힘들어도 연습을 하고 오면 넌 그때부터는 편하게 쉴 수 있어. 아들. 어떻게 할래?


마지막 일정까지 마치고 집에 오니 9시였다. 저녁약을 먹은 아들이 9시 20분이 되자 졸리다고 했다. 낮에 두 시간이나 잤는데, 나도 졸렸다. 아들이랑 같이 안방에서 잤다. 다음 날 7시까지 푹 잤다.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벼웠다. 밤새 내린 비에 땅이 젖어 있었다.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티브이 봐도 돼요?” 기분이 돌아왔다. 움직일 때마다 신경 쓰이던 왼쪽 엉덩이도 통증이 사라졌다. 허리가 아파서 바닥에 있는 걸 주울 때마다 악 소리가 났었는데, 거짓말처럼 온몸이 부드러웠다. 달리고 싶었다.





런데이어플과 함께 달리기

일요일 아침 7시 20분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같이 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달렸다. 런데이어플을 켜고, 신나게 걷다 뛰었다. 30분 운동을 마치고, 마트에서 당근과 사과를 샀다. 요즘 아침마다 과일, 야채주스를 마시고 있다. 종량제봉투를 들고,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집으로 행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 아침 제주 앞바다



아침운동하고, 주스를 마시는 내가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 가슴을 펴고 걷는다. 아침 공기를 만끽한다. 어제까지 이불속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텅 빈 거리를 걷고 있다.







어제의 나도 나고, 오늘의 나도 나다. 어떤 나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나고, 그걸 하고 있는 것도 나다. 나를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것과 내가 먹는 것, 내가 하는 생각이다.




인정하자. 상상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만일 내가 꿈꾸는 모습이 있다면 잠을 잘 게 아니라 일어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집에 오는 내내 실프다.라는 단어가 따라왔다. 글로 쓰고 나서 보내버릴 예정이다.

더 이상 실픈 소리는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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