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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May 05. 2024

다시 일어서는 힘

22년 3월에 블로그를 시작하고, 매일 글을 썼다. 도서포스팅을 시작으로 일상글과 맛집탐방등 주제는 달랐지만, 하루에 글 한편은 꼭 올리고 잤다. 자고 나면 전날 쓴 글에 이웃들이 댓글을 달고, 하트가 달린 걸 확인하는 게 낙이었다. 인스타와 브런치로 글쓰기영역을 넓혀가면서 책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덕분에 글근육이 붙어서 양은 늘었는데,  쓰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쓸거리가 생겨났다.

 그렇게 삼 년째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2주가 넘도록 나는 문장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꼭 읽고 싶었던 책 5권을 빌려왔는데, 한 권만 읽다 덮었다. 몇 번이나 아무 글이라도 써야지 생각하면서 누워 있었다.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아픈 상황에 놓이자 책도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당히 힘들 때는 필사를 하며 마음을 달랬다. 정신이 어지러울 때는 옛 성인들의 말씀이나 철학책을 읽으며 삶의 방향을 찾곤 했다. 이번에는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기운이 없어서 누워만 지냈는데, 그것도 세 아이가 학교에 갔을 때만 가능했다. 아이들의 밥을 차리며 나도 밥을 먹었지만 입이 썼다. 쓴 입에 더 쓴 소주를 들이부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 답답해서 가슴을 치면 마음이 먼저 아팠는데,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그 마음을 안고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끔찍한 악몽을 꿨다. 눈을 뜨면 한숨만 나왔다.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뭐라도 해야 한다며 날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것도 한계에 달했다. 계속 생각했다. 날 짓누르는 마음의 정체를. 형태도 무게도 없고, 아무도 강요한 적 없이 나 혼자 짊어진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낑낑거리는 꼴이 어이없고 화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5월 독서모임이 다가왔다. 모임을 이틀 앞두고도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이번에는 불참할까? 단체톡에 올라온 불참표시를 쳐다봤다. 책은 집에 있으니 지금이라도 읽으면 됐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읽지 않고 있었다.


 끙하고 몸을 일으켰다. 책을 펼쳤다. 불참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로 핑계를 대며 불참의사를 밝혀도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고,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묵묵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5월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은 송길영의 <시대예보:핵개인의 시대>였다.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 그리고 그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감정이 복받쳤다. 힘들었던 4월과 독서모임에 꾸역꾸역 참석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말은 글과 달랐다.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을 누르지 못하고 자꾸 눈물이 나왔다.

주말 아침을 여는 독서모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힘들다는 말, 독서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힘을 냈다는 말을 울먹이며 했다. 회원님들은 톡으로 힘내라는 응원을 보냈다. 몇 분은 눈물을 흘리셨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말을 하고 나니 얼굴에 열이 내려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을 조마조마하며 안고 있었는데, 누군가 폭탄을 해체해 줬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는데, 마음이 그렇게도 무겁게 나를 누르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부끄러운 일이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건 남편뿐이었지만, 21년을 살아도 남편에게 숨기고 싶은 게 있다. 친정일이라면 더군다나 나쁜 일은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한 일도 아닌데,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다. 이번 일남편과의 균형이 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대책없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는 미래의 가족의 모습을 이야기하며, 미래의 삶은 "내가 내 삶을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서로 깔끔하게 주고받는 것입니다. 또는 주고받는 게 없는 관계이거나 말입니다. 받는 걸 당연히 여기거나 '나는 적어도 이만큼은 받아야 하는데'라는 자세는 위험합니다. 어린아이도 용돈을 받으면 고마워할 줄 압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움직이는 일종의 '염치'입니다. P.236


당신은 훌륭해지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부양을 위한 도구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P.262


지금 내게 딱 필요한 말을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에서 하고 있었다. 그동안 큰 딸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했던 모든 것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눈물이 났다.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뭐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도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했던 그동안의 내가 불쌍했다.


   나는 그렇게 대우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할 만큼 했다. 더 이상 내 마음을 속여가며, 내 속을 끓여가며 끌고 갈 필요가 없다. 포기할 건 포기하자. 억지로 끌고 가지 말자. 하는 나도 힘들고, 끌려오는 사람도 하나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정말 끝이다. 2주 동안 골몰했던 생각의 끈을 놔 버리자 근심과 걱정이 저 멀리 날아갔다.


고맙다. 독서모임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들이, 마침 이 책을 선정한 리더가, 그리고 무엇보다 돌덩이 같은 마음을 끌어안고 낑낑대며 책을 읽은 내가. 그리고


다시 글을 쓰는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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