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주차중 4

by 레마누

집은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에 있다. 아이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님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나왔다. 경태는 하릴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누군가를 부르기도 만나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어머니가 방에 있지만, 경태는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애꿎은 담배만 몇 개째 불을 붙였다 껐다. 머리를 긁적이던 경태는 오래 참았다는 듯이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캔맥주를 꺼냈다.


새우깡봉지가 입구에 집게를 달고 식탁 위에 있었다. 서랍을 열자 과자, 라면, 컵라면, 햇반과 참치캔이 보였다. 편리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것들.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배를 채우기에 적당한 것들. 요리라고 부를 수 없는 단지 배만 부르면 되는 것들로 가득 찬 부엌은 살림집이 아니라 편의점 가판대 같았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기를 쓰고 집에 왔나.

경태는 지금껏 제가 고생해서 집을 건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집에 며칠 있어 보니 아내가 곧 집이었다는 걸 알았다. 매일 쓸고 닦으며 윤기를 내야 집이 유지되듯, 결혼 생활도 노력하고 헤아려야 한다. 저절로 되는 건 어디에도 없다.


아내에게 지금 생각을 말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경태는 어리석은 남편을 욕하며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했다. 아내가 집 나간 여자를 옹호하는 말을 하자 넌 집 나가면 끝이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출출한데 뭐 먹을 거 없냐고 물었다. 아내는 요즘 배가 많이 나오고 있다며 야식을 참으라고 대꾸했다. 경태는 어린아이처럼 배고프다며 찡찡대고, 아내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하며 부엌으로 갔다. 달걀과 대파를 넣은 꼬들꼬들한 라면을 들고, 아내가 걸어왔다. 경태가 얼른 몸을 일으켜 작은 상을 펼쳤다. 아내는 살찐다고 툴툴대더니 경태가 먹기 시작하자젓가락을 들고 앉는다. 먹지 말라고 하면서도 경태가 옆으로 비켜 자리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라면 냄새를 맡고 방에서 나온다. 네 명의 아이들이 젓가락을 들고 달려들자 라면이 금세 사라졌다. 아내가 라면 더 먹을 사람? 하고 묻자 5명이 동시에 팔을 번쩍 든다. 아내는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하면서 라면을 끓인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종알거리고, 경태는 티브이 소리가 안 들린다며 조용히 하라고 말한다. 막내와 티브이 리모컨을 두고 싸우기도 했다. 그날이 어제 같으면서도 전설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경태는 오른손으로는 맥주를 마시며, 왼손으로는 리모컨을 돌렸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태는 뭐든 볼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한문철의 블랙박스에 눈을 고정시켰다.


아내의 차는 큰 길가에 서 있다. 언제 주차단속이 올지 모른다. 주변에 불법주차단속 카메라가 있다. 주차선 밖에 있는 아내의 차는 위태로워 보였다. 누군가 단속하러 오면 빨리 자리를 옮겨야 한다. 불법 주차구역에 세워진 아내의 차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주차 중인 아내의 차. 퇴근할 때마다 보이는 아내의 차. 그러나 아내는 없다. 아내는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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