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몬숲 Apr 15. 2024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기쁜 날

비 오는 국립공원


제주도 날씨는 영국처럼 오락가락한다. 

우산을 들고나가면 비가 안 오고 비가 오면 우산이 없다. 

참으로 인생같이 예측할 수가 없구나. 


오늘은 비가 오든지 말든지 아주 가벼운 옷차림으로 

휴대폰과 카드,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겨 숙소에서 나왔다. 


여행길을 떠날 때 가방에 있는 안전함 들은 모두 짐이 된다. 

다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정말 털어버려야지 


이것저것 다 버리고 비에 다 젖어도 괜찮게 출발했다. 

아무 생각 없이 현재에 집중해 봐야지 



자연이 주는 소리, 냄새, 색깔들에 오롯이 집중했다. 

나의 감각이 느껴지니 눈물이 난다. 


살아 있구나.. 살아 있어.. 


보이는 밝음보다 보이지 않는 사연이 훨씬 어둡고, 

인생의 문제는 계속된다. 


나는 또 나에 대해 알아간다.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서 인간의 악함과 선함을 발견하고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고, 거저 받는 은혜를 누린다. 


또 몇 번 사는 게 지겹고 귀찮게 느껴졌지만

아슬아슬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그냥 안고 산다. 


건강을 위해 선택한 비건 프로틴 바를 먹으니 배가 아프다.

주 성분이 분리대두단백이라는데 

내 몸은 콩을 먹으면 탈이 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좋은 것이 다 좋은 게 아니고 나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나의 필요를 알아주는 것이 이기적이라고 느꼈는데 

이것이 치유의 과정이라 하니 감사하다. 


결국은 사라질 것에 애를 쓴다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미란 것은 영원하고, 지속할 것이란 확신이 있을 때만이 느껴졌다. 

그러나 순간순간 해나가는 것들이 언젠가 다 의미라는 게 깨달아졌다. 


죽지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좀비같이 느껴졌는데

살아 있다는 게 감사할 수 있구나. 


내가 최악이라 생각한 것들이 의미가 된다니

그래도 조금은 더 살아봐도 될 것 같다.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면 그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뭘까? 

나를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다. 



역시나 비가 내린다. 

그런데 너무 좋아. 계속 올라가 봐야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끝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안전하게 내려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으로 비를 맞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좋은데 울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다 내려왔더니 해가 쨍쨍한 제주날씨 무엇인가? 

어쨌든 너무 좋아. 과정을 즐길 거야. 등산화를 사러 갈 거야. 



죽지 말아요. 

같이 살아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