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숙제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
숙제는 단순했지만, 아이에게는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밤, 아이는 언니와 함께 커다란 도화지를 펼쳐 놓고,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꺼냈다.
사진 대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아이는 언니와 함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원피스를 입었고, 아빠는 파란 모자를 썼다.
언니와 자신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서툴렀지만, 나름대로 정성이 담긴 그림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숙제를 발표하는 시간이 되고, 아이는 조심스럽게 숙제를 꺼냈다.
그러나 친구들의 과제를 본 순간, 아이의 마음이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모두 다 화려했다. 사진이 있었고, 예쁜 배경지가 있었고, 손글씨도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아이는 도화지를 내려다보다가, 그림 속 엄마 얼굴이 너무 삐뚤어 보여 괜히 미워졌다.
그림도, 칠한 색도, 우리 가족의 자랑을 쓴 글씨도, 모든 게 엉망이었다.
가슴이 콕콕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왜 우리 집엔 가족사진 한 장이 없던 건지 원망스러웠다.
하늘이는 부끄러운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하늘아, 왜 그러니? 어디 아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곤 결국 아프다는 거짓말로 집으로 돌아갔다.
초라한 숙제를 친구들에게 숨기고 싶었다.
하늘이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작아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하늘이는 운동회나 소풍 때도 늘 혼자 숨어서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가난이 들킬까 두려워 말을 아끼고, 친구들을 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심스러움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무언가를 꺼내 보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카페는 막 문을 연 시간이었다.
햇살이 부드럽게 쇼윈도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수가 커피 머신을 준비하며 말했다.
“토요일에 플리마켓 하기로 했대요. 단골손님들이랑 우리 직원들이랑 같이! 저희 카페가 기부 부스 하나 맡기로 했어요.”
사장님이 덧붙였다.
“다들 집에 안 쓰는 거 하나씩만 가져오면 돼. 하늘이도 시간 되면 같이 해볼래?”
하늘이는 망설였다. 싫은 건 아니었는데,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 아.. 저는 그냥 구경만 할게요.”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심스레 하늘이를 바라봤다.
손님이 빠져나간 오후, 커피 향만 남은 카페 안은 잠시 숨을 고르듯 조용해졌다.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하늘이는 물컵을 들고 앉았다.
손님이 사라진 테이블들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카페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 사이로 연수가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있어? 아까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던데.”
그 말에 하늘이는 고개를 들었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냥 괜히요. 별 거 아니에요.”
일부러 웃으며 하늘이가 말했다.
“괜히 그런 게 어디 있어. 말해 봐.”
“언니는 참 따뜻해요. 아세요? 말 안 해도 다 알고, 편하게 배려도 해주고... 부러워요.”
연수는 그저 웃었다.
하늘이는 물을 한 모금 마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사진 만들기 숙제가 있었어요.
근데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도와줄 수 없었어요. 바쁘셨죠... 뭐."
말끝이 살짝 떨렸다.
"그래서 언니랑 둘이서 했는데, 사진도 없어서 그냥 그림으로 그렸고, 바탕은 노란 색연필 하나로 칠했어요.
그땐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다른 애들 숙제 보니까, 너무 달랐어요.
사진도 있고, 색지도 예쁘고, 멋있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제가 해온 게 너무 초라해 보였고,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울었어요.
선생님이 왜 우냐고 물어봤는데, 그땐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렸던 것 같아요.”
조용히 듣고 있던 연수가 말없이 하늘이 옆에 앉았다.
"갑자기 무거운 얘기를 했네요. 이런 얘기 처음해보는데... 언니가 편해지긴 했나 봐요. 하하..."
하늘이는 머쓱해하며 웃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공기를 가르던 에어컨 바람이 멎고, 카페 안은 잠깐 고요해졌다.
“나도 너처럼 속으로만 삼키던 시절이 있었어. “
잠깐의 정적 끝에, 연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대학 졸업하고, 전공은 잊은 채 사무실에 앉아 하루 종일 엑셀만 봤거든.
다들 그게 어른이 된다는 거라고 했고, 나도 처음엔 당연한 줄 알았어.”
하늘이는 연수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르게, 그 표정엔 어디 멀리 다녀온 사람 같은 조용한 빛이 있었다.
“근데 몸이 멀쩡한데, 아픈 느낌이었어.
회사 건물 들어가는 게 무섭고, 아무 일도 안 했는데 하루가 끝나면 너무 지쳐있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명해진 기분이 드는 거야.
말을 걸어도, 보고 있어도, 아무도 날 못 보는 것처럼.”
하늘이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퇴사하고, 우연히 알바로 이 카페에 오게 됐어.
처음엔 ‘이게 무슨 경력에 도움이 되겠어?’ 싶었지.
근데 어느 순간, 손님 얼굴이 익숙해지고, 커피 내리는 손이 편해지고,
‘오늘 하루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들더라.”
연수는 웃었다. 담담한, 하지만 조금은 따뜻한 웃음이었다.
“별거 아닌 순간들 덕분에 살고 있는 것 같았어.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누군가의 하루에 스며들 수 있다는 것.
그게 나한텐 큰 위로였거든 “
처음으로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고, 연수의 이야기도 들으며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나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본 듯했다.
이야기의 끝에 함께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이 궁금하시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마음을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