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같은 마음인 관계가 있다.
언니가 새 차를 뽑았다. 벤츠다. 그런데 새 차 안에서 김치 냄새 투성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벤츠를 운전하는 언니는 멋있었다. 내 20대 시절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특별한 사촌언니가 있다. 동갑내기이지만 학교를 일 년 일찍 들어가 자연스레 '언니'가 된 그녀는, 내 인생의 작은 등대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는 사촌이면서도, 서로에게 경쟁자 같은 친구였다. 그래서일까. 그녀와의 관계는 내게 참으로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과 특별한 소중함이 공존한다.
대학 시절, 나는 언니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키 크고 날씬한 체형에 당당한 태도, 그리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옷도 사주고 용돈도 주던 그녀의 모습은 내게 동경 그 자체였다. 나는 그런 언니가 자랑스러웠고, 그녀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늘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대기업에 입사하면서부터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비교의 말들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다. 나는 여전히 언니를 챙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씩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날 선 반응에 괜히 섭섭했었고, 나는 두배로 날 선 문장을 날리곤 했었다.
인생은 때로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시련을 준다. 나는 유일한 형제인 오라버니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언니는 사랑하는 남동생 (내게는 사촌동생)을 잃었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완벽한 짝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언니도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관계란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나를 멀리하는 언니가 서운했고, 결국 나도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김장김치 담갔는데, 네 것도 챙겨놨어." 갑작스러운 그녀의 연락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친정어머니가 미국에 있는 나를, 김치로 챙겨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되려 달라고 막내 특유의 애교를 떤 적이 있었는데도, 외면했던 언니였기에 이번 언니의 연락에 정말 놀랬다.
한편으론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으면서, 조금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우리는 늘 그랬듯이 형식적인 안부만을 주고받으며, 이웃사촌보다도 더 서먹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내가 김치를 받아도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우리 사이에 쌓였던 차가운 벽을 녹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셨다. 어색할 줄만 알았던 생각은 착각이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너무나 금세 흘러갔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이 봄눈 녹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의 수다에 언니는 웃었다가, 잔소리도 했다가, 한탄 섞이듯 자신의 이야기도 털어놓았다가, 눈망울에 반짝거리는 걸 비치기도 했다. 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가 똑같았다. 밝은 얼굴로, 친정 가족이 그리운걸 숨기면서, 때로는 고독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언니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로는 거리를 두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무장해제된 것 마냥 언니 앞에서 다 털어놓으니 말이다.
“ 직접 키운 배추라서 작아. 그런데 정성 들어간 거니까 아주 맛있다. 이건 매실액 직접 담근 거야. ”
나는 이제 안다. 언니가 내게 전해준 김장김치가 무엇인지를. 진정한 관계란 이런 것일까.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나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언니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에게 더 넓은 마음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제 안다. 혈연의 끈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숨어있다가도 언제든, 어디서든, 나타나 나를 지켜주는 일부분이다.
그렇게 언니는 김치 냄새가 흠뻑 베인 차에 시동을 걸었다. “냄새 좀 나면 어떠냐고, 신경 쓰지 마” 큰소리치며, 언니는 검은색 벤츠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하얀색 백바지에 7센티 힐 구두를 신었던 그때의 언니가 보였다.
내가 22살,
그 시절의 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