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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껏빛나는 Apr 07. 2020

요의와 태동

새벽녘 찾아오는 상념의 시간

한 번 잠에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것으로 유명했던 내가 임신 이후 가장 큰 불편을 겪는 건 시도 때도 없이 날 깨게 하는 요의다.


뱃속의 아기가 커지면서 자궁이 팽창하고, 신체의 내장 기관에 압박을 가하게 되는데 이때 특히 방광이 눌려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 요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라는 인터넷의 글을 찾아보고서는 별 걸로 사람을 다 힘들게 한다는 웃음 섞인 하소연을 남편에게 하곤 했다.

처음 이 현상이 찾아온 건 임신 12주 차 즈음이었다.  세 걸음만 가면 되는 화장실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 지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호기로운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다시 잠드는 시간을 늦출 뿐이라는 걸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어두운 방, 옆에서 자는 남편이 혹시라도 깰까 방 불을 켜지는 못하고 핸드폰 플래시에 의존해 몇 발자국 떼 화장실에 도착. 막상 마주한 얼마 되지 않는 소변량에서 오는 허무함은 이 세상 모든 임산부들이 공감할 것이다. 고작 이 만큼으로 단잠을 깨운 내 방광과 고작 이 정도도 참지 못한 나의 수면욕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

새벽녘 한 번은 기본이고, 많게는 두세 번씩 깨게 되는 이 성가신 요의는 시작일 뿐이었다.

임신 22주 즈음부터 격해진 태동은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
아예 아침까지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빌런(?)으로 떠올랐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 조심스레 왼쪽으로 몸을 누이는 순간 꾸울렁 하고 같이 아기가 뒤척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무 잦고 격한 태동에 얘가 잠을 안 자나 싶어서 유튜브를 찾아봤더니 태동이 느껴진다고 해서 애기가 깨어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도 자면서 움직이듯 그냥 그런 움직임도 있다고.
그래서 이 아기가 깨어 있는 것인지, 잠들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때는 발로 갈비뼈를 차기도 하고, 좌우로 요동 치는 탓에, 혹은 자세를 바꾸는 듯한 움직임에 도무지 다시 잠이 들 수 없는 것이다.

나도 7시 조금 넘은 시간에는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일터로 가야 하는 몸인데,
새벽 4시경 날 깨우는 요의로 시작해 그칠 줄을 모르는 태동으로 새벽이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잠들어야지 라고 노력하는 순간 잠이 더 달아난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알게 됐다.
한 번 자면 깰 줄을 모른다고 말하는 나를 진심으로 부러워한 선배가 있었는데, 잠들려고 하는 노력이 오히려 잠을 더 방해해 아예 잠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말을 몇 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내는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실 이제는 포기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냥 이 시간에 생각나는 것들의 꼬리를 물고 물어보자 하는 심정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이란 것에서 멀어진 지 오래되었으니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나는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 시간을 흘려보냈고 앞으로의 날들에 크게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일이 고되 뻗어버리는 날도 있었고, 혹은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가진 즐거운 술자리의 여운과 취기에 잠드는 날도 있었고, 남편 품에 안겨서 평온하게 잠드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후로는 깨지 않고 아침을 맞이해 또 바쁜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잠들기 마련이었으니까.

새벽녘 상념이란 걸 처음으로 접한 것은 엄마를 간병하기 시작하면서였다.
2011년 유방암을 진단받은 엄마의 치료는 6년을 지루하게 이어졌고,
2017년 1월 더 이상의 치료책은 없다는 통보로 끝이 났다. 더 이상 자라지 않기를 간곡히 바랐던 엄마의

암세포는 간에도 뼈에도 퍼져있었다.

그 이후 7개월은 치료의 부작용도 없이 그 어떤 고통도 없이 보낸 마지막 인간다운 시간이었고
8월 중순경부터 11월 말 돌아가시기까지 딱 3개월의 시간을 아픔과 불편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보낸 엄마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엄마에게 죽음이 성큼 오고 있음을 직감한 나는
휴직을 신청했었다. 10월 중순부터 2개월의 가족 돌봄 휴직을 이용해 엄마를 간병하고자 부산에 내려갔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한 달이 지나고, 10월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엄마는 죽어서야 그 병원을 떠났다. 마지막 한 달, 그 병실에 엄마와 내가 있었다.
새벽이 되면 엄마는 나를 나지막이 불러 깨웠다. 복수로 배가 빵빵해져 잠자리가 불편한 엄마의 잠자리 자세를 바꾸거나, 신장 기능이 약해져 결코 시원하게 소변을 보지 못한 잔뇨감이 괴로운 엄마를 화장실로 부축하거나, 간암 환자들에게서 흔히 드러나는 가려움 증상을 해결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결코 미안해하지 말라 했지만, 엄마는 참고 참다 정말 증상을 못 견디겠다 싶을 때 나를 깨웠다. 가끔은 이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고 싫어 죽겠다는 짜증을 한가득 담아 나를 깨우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엄마의 대단치도 않은 욕구들을 해결해 주고 나면, 엄마는 다시 아기처럼 잠이 들었고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병실의 차가운 천장을 바라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상념에 사로잡혔었다. 간암 환자의 증상을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기도 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죽음이라는 걸 이해해보고 싶어 관련된 책들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 의미 없는 만약을 붙여 엄마가 아프기 전의 날들로 시계를 돌려 보기도 했다.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음에 먹먹함이 밀려와 어쩔 줄 모르는 새벽도 있었다.

그 병실의 차가운 공기,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색, 포근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건조함이 요즘 내가 깨는 새벽과 비슷해 자주 그 새벽들을 생각나게 한다. 임신한 이후 호기심에 남편과 찾아봤던 다큐멘터리에서 슬픈 드라마를 보고 엄마가 울자 뱃속에서 노는 걸 멈추던 태아의 초음파 영상을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엄마를 떠올리지 않은 것이 몇 개월이었다. 엄마도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일주일에 두 번 꼴로 꿈에 찾아오더니 그마저도 멈춘 지 오래였다.
그 잠시 멈춤을 깬 건 엄마의 외손녀였다. 아기로 인해 생긴 신체 변화와 이 조그만 생명체의 움직임으로 인해 다시금 그 병실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다행인 건, 그때의 시간만큼 내가 하는 상념들이 절망스럽지는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도 결국에는 흘러 어느 정도의 안정을 나에게 가져다주었고,
뱃속의 아기를 보지 못하고 가버린 엄마가 애달프기는 해도
작고 꼬물거릴 나의 첫아기와 그려갈 앞으로를 생각해보는 기대감도 상념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엄마가 간 이후 부쩍 늙어버린 아빠에게도 일상의 설렘을 가져다 줄 작고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희망과, 나와 남편에게도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겪어본 적 없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상념의 종착지에 있어 불쑥 찾아드는 엄마 생각에도 멘털을 붙잡고 아침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간이 어떤 의미로는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해주는 한 발 나아가는 시간이 되고 있다.

몇 달만 지나고 나면 이렇게 고요한 상념의 시간마저 그리워질 것이다.
그때는 뱃속에서 움직이는 아기나, 나의 요의가 아닌
우렁차게 울어재끼고 실제 소변을 쏟아낼 작고 소중한 생명체에 평온을 빼앗기게 될 테니까.
배 속에 있을 때가 나았다며 하소연 섞인 농담을 뱉어낼 몇 달 후의 시간을 상상하며 나는 또 잠들러 간다. 비록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깨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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