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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산 신세대 이용원

by 반항녀 Jan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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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밥을 먹고 은행에 볼일이 있다 하셔 가던 길이었다.


가시던 길에 날이 너무 추워 그런지 어지럽다 하셔서 앉을 곳을 찾던 와중 평소라면 눈에 띄지도 않았을 ‘이용원’이 보였다.


(미용실이 익숙한 나라 이용원을 글로 쓰는 것조차 어려운 느낌이다.)


할아버지는 머리도 깎고 잠시 휴식을 가지실 겸 들렀다 가자하셨다.

전부터 미용실을 가야겠다고 하셨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하얀 가운을 입고 서계신 이발사님.


할아버지 머리숱이 얼마 없어 한 10분이면 끝나겠거니, 사실 10분도 안 걸리겠거니 생각했는데 15분, 20분이 지나도 바리깡이 멈추지 않았다.


말 그대로 요리보고 저리보고.

브런치 글 이미지 1

그 새 나는 이발사님 아내 분과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용원이라 젊은 사람들은 오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들만 오는데 그 조차도 요즘은 드물다고. 그러시면서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게 민망하셨는지 그래서 카드리더기가 없다고.


이런저런 주제로 짧게 짧게 이야기를 하는데 따뜻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뭉클. 내 눈꼬리가 뭉클함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이발사님이 바리깡을 끄시길래 돈을 치르려고 일어섰는데 아내 분께서 일어서서 할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튜브였던 무언가가 잘린 듯한 모양새를 한 통에 크림이 들어있었고 그 크림을 할아버지 머리라인을 따라 바르셨다.

그러고는 정말 투박하게 생긴 면도기로 천천히 면도를 해주셨다. 이발사님께서 꼼꼼히 해주셔서 잔털이 거의 없을 텐데도 부분 부분 살피시면서.


머리를 감자고 하시면서 중학교 과학실에서나 볼법한 세면대 앞에 앉으라고 하셨다.

내가 아는 미용실 샴푸는 뒤로 눕는 건데.

마치 집에서 머리 감듯 앞으로 숙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비누칠을 하시고는 머리를 감겨주셨다.

거품을 제대로 만들어주시면서.


그 옆에 진작에 바가지에 받아둔 물에 셀프 세안을 하라고 하셨고 할아버지는 익숙하신 듯 세수를 하셨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밖이 많이 추우니 드라이기로 머리를 꼭 말리고 가야 한다며 다시 할아버지를 자리에 앉히셨고 드라이기마저 1980년 당시 신제품일 것 같은 물건으로 꼼꼼히 머리를 말려주셨다.


로션까지 바르라며 주셨다.


그리고 거울을 보시면서 “아버님 머리하고 나니까 더 이쁘네예” 하셨다.


가격표를 미리 봐두었던 나라 12,000원을 송금하려고 했는데 무뚝뚝하신 이발사님께서는 만원만 송금하라셨다.


그 옆에서 사모님은 “나(이) 많은 사람한테 돈 더 받아서 뭐 하겠습니까.”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따뜻함을 이기지 못하고 정가대로 12,000원을 보내드렸다.

0을 하나 더 붙여드릴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런 행동도 이 따뜻함에 무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받는 것도 더 따뜻해지는데 필요한 일일 거라 생각하며.


할아버지도 너무 좋으셨는지 나가는 길에 “가게 상호가 뭡니까”하셨다. 사모님은 이 오래된 이용원의 이름이 ‘신세대 이용원‘인 게 민망하셨는지 80년에 지어서 그때는 신세대였다는 말을 웃음과 함께 해주셨다.


80년 산 신세대 이용원이다.

-

그렇게 집으로 걸어가는데 할아버지한테 미안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같이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신세대이용원‘의 따뜻함을 느꼈으니까. 처음에는 귀찮았으니까 죄송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읽게 되고. 혼자였다면 내가 가는 길이 이렇게 다채롭지 않았을 텐데 함께라 다채로울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낀 오늘이다.


앞으로 살아가며 어떤 사람과 어떤 새로운 잔가지를 뻗칠지 궁금하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따뜻함에 행복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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