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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freeze 그림책 Aug 22. 2022

너의 사춘기 나의 그림책 9_도망가자

몬테로소의 분홍 벽


우아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니 될 줄 알았다. 친근하면서도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비춰주며 나란히 걷고 싶었다. 고요하면서도 나긋하게 서로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이해하며 서로의 시공간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랑한 낭만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슬프게도 현실은 나의 낭만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산산이 부서지고 발가벗겨진 채로 추락하고 있었다. 끝이 없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 인간 일걸까. 지리멸렬한 현실 속 나는 하릴없이 잠으로 도망쳤다.



 


그림책 <몬테로소의 분홍 벽>은 항구 옆 서양식 집에서 나이 든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하스카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늘 잠만 자는 하스카프를 나태한 고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스카프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꿈에 등장하는 분홍 벽, 정말 아름다운 분홍색 벽을 바라본다.


나에게도 반복되던 꿈들이 있었다. 장르는 다양했지만 그 뿌리는 늘 나의 무의식이었다. 현실의 불안함은 길을 잃고 헤매는 꿈으로 드러나고 관계에 대한 불신은 내가 버려지는 꿈으로 나타났다. 아물지 않은 과거가 재생되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욕망들이 분출되고 해소되기도 했다. 나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꿈의 안내를 받으며 나를 발견해갔다.



하스카프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홍 벽이 있는 곳이야말로 반드시 자신이 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스카프는 꿈속의 남자에게 분홍 벽이 어딘지 묻고 남자는 그곳이 몬테로소라고 답한다. 하스카프는 집을 떠나 몬테로소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열기구를 타고 길 위의 음악가를 만나고 거짓말로 자동차를 얻어 타면서 바다를 만나기도 하고 도둑질하는 소년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운 좋게도 걱정하던 사자 떼는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분홍 벽을 찾아가는 하스카프의 여정은 계속된다.  


필연성을  사건, 다시 말하면 운명이라 부를만한  순간에 우리는 용감해진다.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하고 험난한 길도 감수한다. 나에게는 결혼과 출산이 그러했다. 거기에 나의 분홍 벽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분홍색을 얼핏   같기도 했다.  없이 시작했던  여정은 예상보다 훨씬  외로웠고 버거웠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분홍 벽과의 지난한 술래잡기는 언제쯤 이 날까.



하스카프는 몬테로소에 도착해서 분홍 벽을 찾아낸다. 꿈속에서 만났던 분홍 벽을 바라보며 꿈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화이트 와인을 뿌려 쪄낸 연어 살 같은 벽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앞에서 잠이 든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황홀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달은 하스카프는 어느새 분홍 벽에 스민 고양이 모양의 연한 갈색 얼룩이 되어버린다.


하스카프가 느낀 황홀함이 못내 부럽다. 분홍 벽에 스며든 몽환적인 얼룩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은 이의 나른한 행복이 전해져 온다.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낸 하스카프는 이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_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내가 가야만 하는 곳이 있을까. 내가 있어야만  곳이 있을까.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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