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를 올리고
엄마는 나한테 기대가 없었어?
어린 시절 자신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이가 물었다. 그때 미리 공부를 해뒀으면 지금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는 원망 섞인 질문이었다. 다 너를 위한 거였어,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어, 나는 당당하게 얘기했지만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무지함으로 인해 아이가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인터넷을 검색하며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입시교육에 관한 수많은 동영상 콘텐츠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양한 공부전략부터 시작해서 아이를 명문대에 보낸 성공한 엄마들의 이야기까지. 문득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아이를 대학에 보내기 위한 거라면 뭐든지 해야 했다. 대학을 스스로 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 보내줘야 한다는 게 잘 이해가지 않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아이의 등급을 걱정할 게 아니었다. 당장 엄마로서의 내가 9등급이었다. 나도 아이도 실패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사춘기만으로도 버거운데 도대체 엄마의 몫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가드란 권투에서 선수가 상대편의 주먹을 막기 위하여 취하는 팔의 자세이다. 상대의 공격에 공격으로 맞설 수 없을 때, 최대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드를 올린다. 권투는 누구의 주먹이 더 힘이 있는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기에 왜 서로의 주먹을 내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정해진 룰에 따라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단 하나의 의미 있는 목표이다.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의 표지에는 붉고 커다란 권투 글러브를 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선수가 링 위에 서 있다. 이제 막 경기의 시작을 앞두고 겁에 질린 건지 아니면 경기를 하다가 지쳐버린 건지 알 수 없지만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림책을 펼치면 거칠고 투박하지만 묵직한 그림들이 처연하고 역동적인 리듬을 만들어 낸다. 몸의 동작 하나하나가 의미를 생성하면서 흔적을 남긴다. 생성된 의미의 흔적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올라갈 수 있을까?
그만 내려갈까?
나는 뭘 하는 거지?
쉬울 거라 생각했던 걸음이 멈추었다. 맞고 부딪히며 상처 입고 넘어진 선수는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 남겨진다. 잠시 후 선수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서는 천천히 가드를 올린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선수의 모습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나를 본다. 하나의 장애물을 넘으면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난다. 오를수록 점점 더 크고 험난한 장애물이다. 악착같이 버텨보지만 길을 잃는다. 얼굴은 엉망이 되어간다. 실패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덜 아플 것 같다. 다시 일어서는 저 선수의 손을 잡아채 재빨리 산을 내려가고 싶어 진다.
사춘기가 휘두르는 주먹에 마음 성할 날이 없다. 참고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픈 건 아픈 거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끔찍한 건 지금 보다 커다란 고비가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아이의 성적을 나의 성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아이의 등급이 낮아질수록 나는 형편없는 실패자가 될 것이다. 결국 내가 비난했던 학벌주의 사회에 순응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마주해야 할 실패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남겨질 실패의 흔적들은 어떤 모양일까. 나는 다시 일어서서 가드를 올릴 수 있을까. 산다는 건 사무치게 가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