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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freeze 그림책 Aug 11. 2022

너의 사춘기 나의 그림책 7_공허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

2007년 6월 이후 나는 내 이름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대신 ㅇㅇ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엄마라는 호칭은 구구절절 나를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단번에 덜어주었고, 이렇게 쉽고 효율적인 자기소개서를 나는 늘 잊지 않고 챙겼다. 자연스레 나라는 인간의 의의는 엄마 역할의 성공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좋은 엄마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채 내 쓸모와 유의미함을 확인했다.


공든 탑이 무너졌다. 사춘기 아이는 저 혼자 큰 것처럼 굴었다. 지금까지 엄마인 내가 기여한 몫을 부정했다. 현재의 엄마인 나를 얕보고 공격했다. 내 존재를 구성하고 있던 의미가 산산조각 났다. 내 삶을 지탱하던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하찮고 성가신 존재가 되어 삶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삶을 놓아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희망은 해로웠고 우주는 공허했다.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은 공허할 때 찾게 되는 그림책들 중 하나다. 어느 추운 겨울 검은색만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애너벨은 여러 색의 털실이 든 작은 상자를 발견한다. 털실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았고 애너벨은 마을의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 심지어 물건에도 옷을 만들어 입힌다. 그로 인해 검었던 마을은 다채로운 색을 띠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먼 나라의 귀족이 털실을 사러 오지만 애너벨은 털실을 팔지 않는다. 귀족은 상자를 훔쳐 도망치지만 상자는 결국 애너벨에게 돌아오게 된다. 정말 단순하고 전형적인 이야기다.


익숙하고 흔한 이야기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그저 애너벨이 부러워서다. 털실로 만든 옷을 입은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주위의 시선에 주눅 들기는커녕 그들에게도 옷을 만들어 입혀주는 그 모습이 당차고 멋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며 우쭐대지 않는다. 거창하고 특별한 의미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담백하고 평범하게 일상을 유지한다. 세상의 기준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지킬 줄 안다.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해하는 애너벨을 보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챙겨보는 드라마 하나가 삶의 커다란 낙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잠들고 패잔병이 되어 맞이하는 밤이면 매혹적인 가상의 세계에서 위로를 받았다. 심리적 허기에 감질나던 밤이었고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밤의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여가며 사막 같은 하루를 견뎌냈다. 모든 갈증을 해소할 자유의 날을 기다리며.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뭐가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재미있는  없어진다. 원하던 자유가 주어졌지만 쉽게 지루해지고 금방 식는다. 무엇보다 가장  의미로 키워  아이가 떠나고 남겨진 빈자리가 욱신거린다. 향기 없이 시들어가는 내가 보인다.


그림책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을 보며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한다. 의미를 부여하는데 남의 시선보다 나의 자유를 우선시하기로 한다. 그 의미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남과 나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관계 안에서 태어나는 신비로운 의미들에 나를 열어 놓기로 한다. 고요히 다가오는 작은 의미들로 내 빈자리를 채우고 싶다. 천천히 음미하며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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