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가볍게 타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 실수해 놀림을 당했던 일,
바보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엉망이었던 성적표,
하지만 무겁게 타는 것들은
나를 위해 영원히 타지 않았다.
아빠는 사랑이 너무 많아 엄마와 이혼했다.
그 뒤로 아빠는 딸 같다는 그 여자를 유독 아꼈다.
엄마는 너그러워서 찾아와 때리는 남자친구들의 폭력을 신고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이혼한 엄마는 유부남만 골라사귀기 시작했다.
나는 빌어먹을 효자라서 더 밝게 웃었다.
그로 인해 그늘이 없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을 법한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떠올렸다.
유부남과 통화하며 웃던 엄마가 갑자기 전화를 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밥 숟가락을 뜰 때, 사랑이란 게 뭔지 궁금했다.
감각적으로 배운 슬픔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언제나 반대로 행동했다. 모두들 좋아하기 시작했다. 불행을 멀리 두기 위해 웃으며 넘겼더니, 사람들은 내가 밝아 부럽고, 웃긴 사람이라 했다. 그것을 나의 장점이라며 다들 추켜세웠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게 좋다. 이런 장점 덕분에 무례한 사람을 대하기가 수월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에는 주로 말 못 할 비밀이 숨겨져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로 난 사람들을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다. 장점이란 건 그 사람의 깊은 멍에서 비롯된 거니까.
이런 나도 특별한 사랑을 원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감추려는 옷 사이로 새하얀 팔에 푸른 멍이 자주 보였다. 그녀는 자주 웃었고,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아마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 느꼈다.
푸른 꽃 델피늄을 손에 쥐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너같이 잘 웃는 사람을 알고 있어.”
나는 그녀의 말에 몸이 굳었다.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잠시 침묵한 후, 눈을 피하며 말했다.
“넌 내가 관심 있는 게 아니라고.”
“그래? 맨날 웃기기만 해서 그런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지한 사람이란 걸 보여줘야겠네.”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며 가벼운 농담으로 상황을 넘기려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사실 네 몸에 난 상처들을 봤어. 신경 쓰이더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자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네가 뭔데 날 불쌍하게 여겨?"
나는 순간 당황스러움을 느꼈고, 반응이 예상과 달라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괜찮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
그녀의 차가움에 나의 멍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고백은 무너졌고, 가져온 델피늄은 퍼렇게 시들었다.
그 후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빠는 자주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더라. 술을 마시고 폭력을 일삼아 이웃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해 보였지만 다른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짓이겨지는 듯했다.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던 나는, 이 감정이 순수하다 여겼다. 고통을 공유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이끌렸다.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멍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 상처를 더 얹어줄 수밖에 없을 관계였다. 그 고백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난 더 이상 멍들고 싶지 않았다.
기억은 순간적이어서 반복해 곱씹어 외웠다. 솔직하지 못한 상처의 벌림을 요구한 탓이었다. 그 마음이 괘씸해 더 밝게 웃으며 스스로 입을 닫고 지냈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탓이라 칼을 꽂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게 있었던가? 내 마음의 진실과 영원히 멀어질 것 같다.
고백했지만 차였던 기억. 이 기억을 태우는 건 어려웠다. 그 감정이 불쑥 떠오를 때면, 온몸에 가득한 멍 크기를 재느라 안을 보고 있을 뿐. 그 뒤로도 유일한 장점을 웃으며 태운다.
이게 잘 타고 있다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