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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r 31. 2022

2018.3.15 / 태풍이 휘몰아치는 다윈

다윈, SKYCITY Darwin 

호주행을 결심하였을 때 가장 먼저 생각 났던 사람은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 누누언니였다. 누누언니는 나의 이종사촌으로 어릴 적 나를 끼고 놀아주었던 언니 중 한 명이었는데, 어찌나 잘 놀아주었던지 아직도 집에 가기 싫다고 울던 기억이 선하게 남는다. 다윈이라는 조금 낯선 도시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언니는 당시 나에게 그곳에서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전설과도 같이 내려오는 '워킹홀리데이로 시작해 이민도 왔다더라'의 살아있는 증인과도 같았다.


그런 언니가 나에게 해준 조언으로는 10년 전 언니가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당시 토익점수가 850점 이상이었다는 것, 그 시절에는 실제로 한국인들을 가깝게 지내며 한국인이 살기에 유용한 정보들을 얻고는 하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 처음에 언니가 일했던 곳은 한인잡으로 샌드위치 가게였는데 그곳 사장 딸이 퍽 못되게 굴어 얼마 안 있어 그만두고 사진관에 들어가서 재미있게 일했다는 이야기 등 실제로 언니가 겪었던 '그 시절의 워킹홀리데이 경험담'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용한, 그 시절의 워홀 초창기 이야기.


다른 도시에 비하여 처음엔 적응하기 쉬운 시드니를 떠나 더 많은 기회가 있는 외곽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떻냐는 언니의 제안에, 그래도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해보고 싶다며 나는 부득이 시드니행을 고집했다. 사실 언니가 말하는 '언니가 있는 다윈으로 오는 건 어때'라는 말의 의미를 퍽 잘 알고 있었고, 언니 옆에 살면 도움을 받을 순 있겠으나 그 자체가 나에겐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호주로 떠나기 전 악착같이 영어공부에 매달렸다만 당장 외국인들과 일할만큼 의사소통이 원활한가에 대해선 나 스스로도 회의적이었고, 무엇보다 누군가 옆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단단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선천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는 일을 도통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모든 게 어려울 터였다.


그렇게 언니와의 통화 후 1년이 지나 호주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할 즈음, 나의 마음 상태는 온전한 편이 아니었다. 1년은 워킹홀리데이 비자, 반년은 학생비자로 체류할 계획을 뒤엎고 몸도 마음도 괴로웠던 좁은 가게에서 두 달을 겨우 버티고 나온 나는 고작 삼천오백불 남짓 한 돈으로 한 달가량의 여행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퍽 갑갑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호주 여행은 유럽과는 달리 투어와 액티비티만으로도 꽤 비싼 데다가 내가 가려는 퀸즐랜드는 대부분 휴양지인 탓에 그 액티비티와 투어 말고는 이렇다 할 관광거리가 없었다. 돈이라도 많아 호텔에서 묵는다면 휴양하는 마음으로 유유자적 살겠다만, 이번 여행은 나에게 있어 호주 워홀을 마무리 짓는 하나의 숙제와도 같았고 없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많이 보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계획하고 없는 살림에 언니가 살고 있는 다윈을 갈지, 아니면 과감히 포기할지를 고민하던 찰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언니와 조카를 보러 가겠나 하는 마음으로 다윈행 티켓을 끊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계획하며 돈이 없다면 돈을 꿔줄 수도 있다는 친구의 감동적인 제안을 거절하고 천사 같은 조카에게 입힐 선물을 고른 후 집과 일터에 노티스를 내며 준비를 마쳤다. 한눈에 보아도 내 것임을 알 수 있는 물방울무늬에 캐리어 가방을 끌고 몇 시간의 비행 끝에 다윈에 당도하였을 때, 언니에게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별을 남긴 후 공항 주차장에서 몇 년 만에 언니와 조우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언니는 한결같았고 큰 어색함 없이 우리는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1년간의 쉐어하우스 생활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가정집은 그 이름만으로도 단란하였고, 다음날 만난 천사 같은 조카는 너무도 조그맣고 귀여운 나머지 그저 바라만 보아도 몸에서 도파민이 솟을 정도였다.

조지 브라운 다윈 보타닉 가든스(George Brown Darwin Botanic Gardens)

사실 다윈은 돈이 없는 나 홀로 여행객에게 선뜻 추천하기 어려운 곳임이 분명했다. 다윈의 유명한 관광지인 카카두 국립공원은 투어 가격만 하더라도 비싼 데다가, 습지대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점핑 크로커다일(보트에 승선하여 악어가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로지 하늘의 운에 맡겨야 할 정도로 날씨에 좌우되었다. 언제 태풍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우기에 여행을 떠난 나로서는 애당초 투어와 액티비티 활동은 포기하였고, 다윈 공식 관광 홈페이지에 소개되었던 마켓 역시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어, 나처럼 마켓도 보지 못하고 우기에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스카이시티 카지노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관광을 할 리 만무했다. 물론 나야  애초에 다윈만큼은 관광이 아닌 언니 내외와 갓난 배기 조카를 보러 온 것이었기에 머무는 내내 날씨가 흐렸던 것이 원망스럽지 않았지만.


괴랄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내가 조금이나마 관광 다운 관광을 할 수 있도록 갓난 배기 조카와 함께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해주었다. 그중 첫 번째는 페니베이 쪽에 위치한 강과 보타닉 가든이었는데, 다윈의 보타닉 가든은 시드니의 것보다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언니의 산후조리를 도우러 마침 다윈에 계셨던 외숙모와 나는 공원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었는데, 꽃과 나무 앞에선 여전히 소녀 같으신 외숙모는 공원에 있는 다양한 꽃들이 뽐내는 자태에 연신 감탄하시며 사진을 찍으셨다. 꽃에 큰 감흥이 없는 나로서는 사방에 피어난 꽃보다도 흐린 날씨의 공원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운치가 퍽 마음에 들었고, 공원을 거니는 내내 이런 고요함이 비수기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묘미임을 확신했다.


언니는 나를 보타닉 가든에 데려간 뒤, 시내 구경을 더 시켜주겠다며 노던 주립 도서관을 데려다주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늘에서 누군가 물을 퍼붓듯 장대비가 쏟아져 하릴없이 돌아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언니는 잠든 나를 서둘러 깨웠고, 난생처음으로 태풍으로 인해 집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보며 가족들 모두 태풍이 언제쯤 지나갈지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관광 다운 관광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언니에게 나는 우스갯소리로 언제 외국에서 태풍을 경험해보겠냐며 농담을 던졌고, 다음날 나는 하루를 온종일 집에서 보낸 것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맑은 하늘을 맞았다.

SKYCITY Darwin

이곳은 언니와 형부의 근무지이기도 한데, 처음 언니의 직업을 들었을 시 한국에서는 한창 드라마 올인이 유행을 했던지라 친구들에게 '우리 친척 언니가 카지노 딜러래'라고 말하면 으레 어깨가 으슥하곤 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벌써 10년 전이니, 언니는 벌써 카지노 딜러로서 다년 차가 되었고 언니 뒤에 껌딱지처럼 붙어 놀아달라 졸라댔던 나는 홀로 시드니에 올 만큼 나이를 먹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시드니에 살던 언니가 어떻게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언니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답하였는데, 그 과정을 듣고 나니 언니가 더욱 대단해 보였다.


당시 언니는 같이 일하던 한국인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히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호주를 떠나기 전에 영어를 단단히 준비하고 간 언니로서는 준비에 맞게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당장 같은 일자리를 제의받았다 할지라도, 나의 영어실력에 주눅이 들어 거절을 하였거나 혹여 트라이얼 과정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 것이다. 운은 역시 준비한 자에게 기회를 허락한다. 이 당연하고도 당연한 이치는 종종 눈앞에서 현실로 보고 나서야 실감하게 된다.


뷔페에서 밥을 먹으며 언니는 이곳에 웨이트리스들이 종종 딜러만큼 돈을 벌기도 하며, 나 역시 어쩌면 시드니가 아닌 다윈에서 시작하였다면 트라이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며 말했다. 내심 형부도 그것에 대하여 함께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지만, 호주를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 내게 정착할 도시를 선택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시드니행을 택했을 터였다. 멜버른을 택했다면 반년 만에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며 다윈을 택했다면 오로지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은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시드니에서 있었기에 소중한 인연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고 지독히도 외로운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으며 생전 해보지도 않은 일을 해보며 남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자존감이 바닥 치는 경험 역시 할 수 있었다. 물론 스카이시티 면접 후기를 찾아보니 트라이얼의 기회를 얻는 것조차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이트 클리프 부두 (Nightcliff Jetty)

케언즈로 떠나기 전날 구름에 다소 가려진 하늘이 맑게 개었고 나는 나이트 클리프 부두에서 풍경 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휴양지는 고로 어느 바다에라도 뛰어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에메랄드빛 바다에 드넓은 하늘을 상상해온 나로서는 악어가 출몰하는 다윈의 바다에 당혹하기 짝이 없었다. 속으로는 '악어가 출몰하는 바다에 왜 휴양하러 오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하늘과 바다색이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시드니와는 다르게 다윈의 바다는 다소 혼탁한 느낌이었다. 이는 사진을 찍고 나니 여실히 티가 났는데, 되려 하늘색이 더욱 바다에 가까워 보였다. 그 후 찾은 공원에서 연못은 아름다웠지만 나무에 앉은 새떼들의 크기가 무시무시하여 이곳이 동물원인지 길을 지나가다 발견한 공원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다윈은 복잡한 시드니와는 다르게 작은 도시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 분명히 존재했고, 애초에 휴양이라는 것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것이라면 이만한 도시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윈으로 떠나기 전 날은 마침 조카 올리비아의 100일이었다. 호주에서는 한국과 다르게 100일을 기념하지 않은 터라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언니는 그럼에도 기념사진은 남기길 바랐고 조촐하게나마 언니와 함께 케이크와 파티용품을 고른 뒤 형부가 맞춘 올리비아의 알파벳 방석들을 일렬로 늘어트리며 조금이나마 스튜디오 분위기를 내고자 노력하였다. 언니는 올리비아의 옷 중에서 드레스를 골라와 입혀보았는데 습한 날씨와 외출로 인해 고단했는지 올리비아는 연신 칭얼대었고, 조금이나마 이쁜 사진을 찍기 위하여 세 사람이 어르고 달래어 100일 기념 촬영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윈 여행은 사실 말하자면 다윈을 보러 간 것이 아닌 타국에서 살고 있는 언니네 집을 방문한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언니네 집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나는 외숙모께서 차려주신 음식들 덕에 근 1년 만에 한국식 집 밥을 먹어볼 수도 있었고, 처음 뵈었을 때에는 영어울렁증에 차마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했던 형부와도 대화를 꽤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이민을 바라보고 호주로 왔던 사람으로서 언니의 조언과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외국에서 사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가족이 사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자니 이민은 시민권을 따고 안 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낯선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그 사실을 한국을 떠나는 것에 급급했던 나로서는 호주에 오고서야 실감한 것이다. 결혼이라도 한다면 아이를 임신하고 그 아이가 백일이 되는 과정까지 남편 외에는 의지할 사람 없이 오롯이 스스로 해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니 덜컥 겁부터 났다. 그러니까 이민이라는 것은 한국이 떠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골몰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남이 아닌 가족과 한 집에 묵고, 명절에 맛보았던 외숙모의 손맛 가득한 음식과 더불어 저녁엔 형부가 잡아주신 게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던 다윈. 비록 궂은 날씨 탓에 대단히 액티비티한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동생이 왔다며 바쁜 와중에도 챙겨준 언니 덕에 호사를 누리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다음 날 언니의 배웅에도 불구하고 낯선 다윈 공항에서 잠시 헤매었던 나는, 공항의 끝과 끝을 두어 번 정도 이동한 끝에 간신히 수속할 수 있었다. 다소 정신없는 와중에도 카페인을 챙기기 위하여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던 나는 그렇게 홀로 퀸즐랜드를 여행하는 첫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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