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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 Jun 19. 2022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석류의 씨

2022년 4월 여성 작가의 책 | 석류의 씨 (이디스 워튼)

책 속의 말

모르타르와 유리, 자갈의 쓸모없는 조각들로 단단한 대리석의 형태를 만들 수 있듯이 뒤죽박죽 섞인 비루한 것들에서 삶의 압박을 견디게 해줄 사랑이 빚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편지)
“용기, 그게 바로 비밀이었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눈빛 속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석류의 씨)




“석류의 씨”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1 ‘여성과 공포’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이다. 그녀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고, ‘여성과 공포’ 시리즈답게 고딕 소설 세 편과 대표작 한 편을 담았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 ‘빗장 지른 문’, ‘석류의 씨’, ‘하녀의 종’ 네 편이다. 나는 전자 두 편과 후자 두 편의 결이 약간 다르다고 느꼈다. 전자 두 편은 보다 현실적인,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담았고, 후자는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고딕 소설다웠다. 유령이 등장하고 미스터리에 휩싸인 저택이 등장하곤 하는.

그럼에도 이 단편집을 관통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자면 ‘불확실성’이라고 생각했다. 네 편의 단편, 특히 ‘편지’를 제외한 세 편의 단편은 결말을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 결말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정체 모를’,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 이 자체가 고딕 소설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불안을 극대화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는 이 애매한 상황에 기묘한 불안을 느끼며 불편한 감정도 들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해설과 허정애의 “침묵과 흉내내기: 워튼의 유령이야기에 나타난 여성언어의 억압”이라는 논문 덕에 이 불편함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글에 따르면 워턴은 “고딕소설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사회학적 문제, 무의식적 욕망과 관계되는 심리적 문제다. 워턴이 숨겨져 있으며 억압적인 문화적 터부와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는 유령 이야기를 여성 문제를 탐색하는 장치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여성은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통로가 봉쇄당해 소외되고, 침묵 당하고, 성적으로 억압되며, 살아있으면서도 이미 유령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억압은 숨겨져 있고, 비밀스러운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 속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게 이 논문에서 제시한 이야기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니 모호해지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항상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게 (특히 여성에게) 일상적인 공포가 되기에 고딕 소설로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고 공통적으로 한 말은 주인공의 심정을 여성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편지’의 결말 주인공의 심정을 독서 모임의 넷 모두 공감하며 읽었기에 여성으로서의 경험(혹은 그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르게 독해하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디스 워턴이 살던 시대와 현재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심정적으로 깊게 공감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고딕 소설을 통해 ‘은연중에’, ‘은밀하게’ 전한 메시지를 우리는 지금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나 아직도 두려운 부분이 있다. 시간을 100년 가까이 뛰어넘어도 아직 변하지 않은 게 있다니,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과제가 여전히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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