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쪽지

찌질한 상상

by 거짓말의 거짓말

만약 그쪽이 이 편지를 지금 읽고 있다면 적어도 그쪽과 저는 세 번 이상 마주쳤다는 뜻입니다. 오늘까지 저는 우연히 그쪽과 두 번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 그쪽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우연히 그쪽을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행운이 제게 온다면, 그때에도 저는 지난 두 번 하지 못한 말을 그쪽에게 몹시 전하고 싶어 할 테고, 그렇지만 막상 그것을 말하자니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서 우물쭈물 시간만 보내게 될 테고, 그쪽이 제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한동안 또 멍하게 있다가 멍청한 자신에게 화를 내게 될 테니, 만약 그쪽을 다시 만나게 되면 지갑 속에 쪽지를 하나 넣고 다니다가 그쪽에게 전해 줄 생각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말이죠.


사실 지금은 딱 다시 한번만이라도 그쪽과 우연히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행여라도 그쪽을 정말 다시 마주치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그쪽을 마주하게 됐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작은 쪽지마저도 전해주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정말 멍청한 자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혹여 네 번째로 만나면 정말로 그쪽에게 말을 붙여봐야지 따위의 자위를 하는 저 자신이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정말로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우연이었습니다. 학교의 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 한 시인의 초청 강연회 시간에 딱 맞춰서 간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평상 시라면 맨 뒷줄이나 중간의 구석쯤에 앉았겠지만 강연 시간이 임박한 탓에 빈자리가 얼마 없었습니다. 맨 앞줄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쪽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네 좌석 중 비어있던 그쪽의 옆에 앉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한 것에 놀라 주위를 쭉 한번 둘러보다 그쪽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그 후로 약 한 시간 반 동안 제 시간과 공간은 그쪽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쪽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온 신경과 관심은 제 의도와 상관없이 그쪽에게 쏠렸습니다. 시선을 둘 때가 없어 고개를 떨구고 있다 마침 치마 위에 올려놓은 그쪽의 두 손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언가가 하필이면 거기에 있단 사실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그쪽의 왼손 약지에는 작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왼손인가, 그리고 왜 약지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 선지 그쪽은 왼손의 반지를 빼서 오른 속의 약지에 옮겨 끼웠습니다. 순간 어떻게 그것을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며 그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시인의 강연이 이어지고, 저는 어떻게 하면 그쪽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를 내내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시인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지만, 태연한 척하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이 웃으면 따라 웃고, 박수를 치면 따라 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든 기회를 봐서 그쪽에게 따로 말을 걸자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쪽의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면 제가 시인에게 질문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든 그쪽의 옆 자리에 있는 것이 그 '무엇'이 아니라, 어떤 '사람', 나라는 것을 그쪽이 알았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어떤 소리가 나면 그쪽이 나를 한 번쯤 바라봐 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손을 들고 시인에게 되는대로 아무 질문이나 던졌습니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은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은 언제든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이 조금은 바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시인님께서는 '당신 참 좋은 사람이군요.'라는 말과 '당신의 시는 참 좋아요'라는 말 중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더 행복하고 기분이 좋으신지 궁금합니다."


시인이 답변하는 중간에 그쪽은 작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다듬고, 가방 속에서 파일을 체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이 시 두 편을 낭송하는 모습을 보고 그쪽이 거기에 앉았던 이유라던가,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있었던 이유 등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쪽은 시인에게 자필 서명이 된 시집과 함께 어떤 종류의 상을 받기로 예정된 것 같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시인의 시집을 받아 든 그쪽은 시인의 사인을 받기 위해 한동안 강단에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저는 도서관 밖에서 그쪽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그쪽이 도서관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쪽이 제 뒤에서부터 걸어와 제 오른쪽을 스쳐 지나갔고 중앙 도서관의 계단을 내려가다 순간 멈춰서는 것도 보았습니다. 말을 걸어야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수십 번을 넘게 회오리쳤지만 제 몸은 석상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쪽은 점점 작아져서 제 왼손 약지 손가락보다 작아졌고, 결국에는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두 번째도 우연이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때 저는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 정문으로 가고 있었고 그쪽은 학교에서 가까운 지하철역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쪽과 비슷한 옷과 머리스타일을 한 여자들이 적어도 4~5명은 그 길에 더 있었지만 한눈에 그쪽을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저는 버스를 세우고 내려서 그쪽에게 말을 걸 생각조차 못 하였습니다. 오히려 버스에 타고 있어서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안도하기까지 한 것 같습니다. 버스는 야속할 만큼 빠르게 학교 정문으로 저를 실어 날랐고, 저는 들어도 그만 듣지 않아도 그만인 '성과 문학' 교양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성과 문학 수업을 포함해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15학점 전부 F학점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쪽에게 말을 걸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해봤자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습니다.


쓰다 보니 이 편지는 그쪽에게 전해주기에는 너무 길어져버렸습니다. 저는 다시 이 편지를 그쪽에게 전해 줄 수 없는 멋진 변명거리를 하나 찾았습니다.


이 편지는 너무 길어서 봉투를 여는 순간 읽기 싫어질 거야.

그래서 저는 이 편지 대신에 그쪽을 다시 만나면 바로 전해 줄 수 있는 쪽지를 쓸 예정입니다. 지갑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두 줄, 혹은 세 줄로 말이죠.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2011.05.24

keyword
이전 01화될성부른 찌질이는 떡잎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