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누구라도(그럴 일은 없겠지만 심지어 계륜미나 김태희라도) 나와 한 밥 약속을 깨는 건 상관없어. 또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아서 먹거나 혼자 먹어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네가 약속 당일 나와의 밥 약속을 깨면 나는 어쩐지 화가 나. 평소에는 아무리 화가 날만한 일에도 참는 데는 선수인 나지만 그럴 때는 어쩐지 굉장히 화가 나.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혹은 나와의 약속이 네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서만은 아니야. 네가 당일에 밥 약속을 취소하면 그날은 너랑 같이 밥을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나는 화가 나. 그런 날은 정말 화가 나"
당연한 얘기지만 밥은 중요하다.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밥은 삶을 영유하기 위한 수단이며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다.
그래서 밥을 같이 먹는 행위도 굉장히 중요하다. 단순히 허기를 채우고 이야기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친교를 다지는 수준을 넘어선다.
가령 얼마 전 읽은 마루야마 겐지 아저씨(굉장히 염세적이고 까탈스러운 노인네)의 화법을 잠깐 흉내 내서 말하자면 밥을 먹는 행위의 의미는 아마도 아래처럼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남녀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면 그건 일반적인 일이지만 남녀가 함께 밥을 먹지 않고 잠을 자면 그건 짐승만도 못하다는 욕을 들어도 싸다" (어쩐지 써놓고 보니 내일부터 쑥과 마늘을 열심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는 물론 농담)
물론 반대로 "남녀가 함께 잠을 자고 밥도 함께 먹으면 그 관계는 단단한 것이지만, 남녀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함께 먹지 않으면 역시나 또 짐승 같은 년놈이다" (어쩐지 뒤통수가 묵직한 것은 지금 감기 기운이 있는 탓이겠지...)
밥을 함께 먹는 행위의 궁극적인 형태는 결국 '결혼'이라는 약속이다. 결혼은 달리 말하면 '나는 당신과 죽을 때까지 같은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겠다는'는 약속인 것이다.
이혼 없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지 않으면 결국 그 결혼 생활에 의미는 없지 않을까?
또 설령 불확실한 불륜의 관계일지라도 아내에게는 한 끼 외식비를 아까워하는 하는 남자가 내연녀에게는 그 수배의 값을 지불하고 즐겁게 밥을 먹는다면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래서 정상적인 부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함께 밥을 먹으며 가끔씩은 서로를 먹기도(응?) 하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바꿔 말하면 누구와 함께 밥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서른에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차피 마루야마 겐지 할아범은 한국어를 모르니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도 마음속으로 '씨발 씨발'을 외치며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결국 밥을 먹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는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별로 맛이 없다. 오늘도 우리가 개처럼(미안하지만 난 슬쩍 한 발을 빼도록 할까)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누군가와 함께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군가 인지 잘 모르겠다면 서두에 언급한 문장을 참고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즉 나와의 밥 약속을 취소해 버렸을 때 화가 나는 사람, 그 사람과 밥을 먹으면 대체로 뭐를 먹어도 맛있다.
p.s. 옛날에 한 사람이 진짜로 싫으면 그 사람이 밥을 맛나게 먹는 모습이 그렇게 꼴 보기 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반대로 한 사람이 밥을 맛나게 먹는 모습이 예뻐 보이면 그 사람과 평생 밥을 먹는 일을 고려해도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