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먹고, 살고
사람은 이제 원시인도 아니고 의, 식, 주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삶의 질이 확 떨어지게 된다.
좋은 옷을 입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능력이 된다면 좋은 집에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준이 뭘까?
좋은 옷 나의 성향은 털털한 성향이어서 이쁜 옷은 못 입는다. 성향의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작은 키에 통통한 체형은 내 생각에 아무리 이쁜 옷을 입어도 옷 태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쁜 옷은 행동에 제악이 많이 따른다.
특히 치마류의 옷은 더더욱
그래서 나에게 좋은 옷의 기준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그런다.
'엄마 어디 갈 때는 좀 좋은 옷 좀 입지?'
좋은 옷.
물론 나도 사람들 만나러 나갈 때는 그저 편한 옷만 입는 것은 아니다. 나름 그래도 깔끔해 보이는 옷을 챙겨 입고 간다고 하는데도 아이들이 보기에는 내가 입는 옷 스타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옷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평소의 일만이 아니다.
모임에 나가서 보면 어쩜 그렇게 이쁘고 멋진 옷을 입고 오는지... 때때로 나만 초라한 옷을 입고 온 건 아닌가? 하고 눈치가 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고급 진 옷을 입고 불편하게 있는 것보다는 편한 옷을 입고 행동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나이다. 옷이 날개라고 옷을 멋지게 입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한다. 나도 좋은 옷, 멋진 옷을 입으면 사람이 달라 보이겠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아직은 내가 나를 드러내야 하는 그런 모임에 가야 할 일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나도 옷을 갖춰 입게 될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엄마가 먹을 틈도 없이 과일을 먹고, 맛있는 고기반찬이 나오면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가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떠오르는 게 '칼국수' 정도이다. 딱히 유난스럽게 막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 이런 나에게 음식은 그저 나의 떨어진 에너지와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일 뿐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에 정성을 들인다거나 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 세상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남이 차려준 음식'이라고 말하게 된다. 내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장을 안 봐도 되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세척을 하고 다듬고 만드는 과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음식을 차려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나도 내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그런 때는 내가 주방에서 해방되는 날 오지 않을까?
좋은 집
예전부터 재산을 늘리는 하나의 방법으로 변한 집.
내게 좋은 집은 필요한 공간이 있고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기능을 하는 집이다.
우리 가족과 내가 사용할 공간이 있고 먹고사는데 약간에 도움을 주는 정도면 내게 있어 집은 그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성향이나 취향을 보았을 때 나는 기능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굳이 부자가 되지 않아도 내가 편한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픈 배를 채울 수 있고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
이것이 나의 의, 식, 주 선호 경향이다.
굳이 더 좋은 것을 취하려고 욕심내지 않는다.
되려 이렇게 주어진 환경에서 살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렇다고 내가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의, 식, 주 보다 더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건 나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에도 각자가 생각하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 가족이 같이 먹고살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면 된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돼도 안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