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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Mar 18. 2017

빈자리,떠난 자리

금요일 늦은 오후, 볕이 좋다. 이렇게 봄이 오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기예보를 살폈다. 왠걸, 다음 주엔 눈소식이다. 그럼 그렇지


아무 생각없이 시선을 두다 보니 에스프레소 머신에 시선이 멈춘다. 캡슐을 안채워 두었네, 하긴 누가 먹는다고...

색색의 캡슐을 꽉꽉 채워놓던 자리가 텅 비었다.


당신은 에스프레소머신이랑 안맞아, 드립커피를 마시려면 모카마스터를 사야지...


무슨 커피를 그렇게도 대단하게 마신다고 한 집에 커피머신을 여러 개 두나 싶어 모카마스터 구입을 말려왔다. 덕분에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뽑은 뒤 뜨거운 물을 부어 커다란 머그잔에서 한껏 흐려진 커피를 마셔왔다.


두어달 만에 집에 들른 남편은 본연의 맛을 잃어버리고 마는 커피캡슐이 안타까웠는지, 커피를 뽑아 들고도 물끓이는 아내가 번거로워 보였는지 기어이 모카마스터를 구입해 설치했다.


맛있지? 당신은 드립커피라니까...
모카마스터를 새로 구입해 부엌 한 켠에 설치했다.




네스카페는 치울까? 당신은 모카마스터쓸테니까 안쓸거 아냐


아니, 그냥 둬. 치우지 마.


캡슐이 채워지지 않은 커피머신을 보니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을 남편의 빈자리가 함께 떠올라 커피머신이 외롭다.


속도 없이 볕이 좋네, 이불이나 빨아야 겠다. 베게와 이불커버를 벗기고 침대시트를 벗겨내다 말고 문득, 남편의 베게와 이불은 빨아서 이제 정리해 두어야 하나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핀란드의 업무를 최종 마무리하고 어젯밤 책상을 정리한 남편이다. 공식적으로 핀란드로의 마지막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내는 그의 이불을 빨고 있다. 이 집에서 이사해 나갈 때까지 남편이 이 집으로 돌아올 계획은 없다. 이불은 정리해도 좋다.



커피머신도 안치웠으면서 이불은 왜 정리해... 그냥 몇 달 더 두지 뭐...


에스프레소 마실 사람도 없고 이불을 덮고 누울 사람도 없지만 청소기는 지난 주보다 더욱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 가고 식기세척기안은 보송보송해졌다. 남편이 집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짬짬이 청소기 필터를 청소하고 식기세척기를 소독한 덕분이다.


저녁을 준비하느라 칼질을 하다 말고 유난히 잘 드는 칼날에 멈칫했다. 핏방울이 살짝 맺힌다.


칼 갈아야 하지 않아?

아니, 아직 괜찮아요.

앞으로 몇 달 버틸 수 있겠어?

그럼 그때 집에 와서  갈아줘, 지금은 그냥 나둬...


어젯밤, 아무말 없이 칼을 갈던 남편의 뒷모습이 떠올라 살짝 맺힌 핏방울에도 눈물이 맺힌다.


칼날이 무뎌지고 청소기 필터에 먼지가 내려앉을 때면 한 번 더 이불을 빨아 정리하고 커피머신도 박스에 담아 치워야 겠다. 그 즈음에는 떠나고 난 빈자리도 그리 헛헛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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