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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아기도깨비라고

D+30

by 라피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저 결혼하면 임신하고 아기를 낳는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 세상에, 임신과 출산은 뭐 일도 아니지... 정도로 생각했다랄까? 이 어리석은 생각을 고치라는 뜻이었는지,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졌으나 진통 기미가 없었고 아기가 큰 편이라 제왕절개를 진행하기로 했다. 수술 전날 입원을 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 양수인가? 싶었으나 애매한 양이어서 간호사들도 몇 번이나 긴가민가 했다. 그러다 결국 양수로 판명.


수술을 예약하고 입원한 상태였기에 담당선생님은 응급수술을 권하셨지만, 양수가 터진 상황이다 보니 자연분만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선생님은 내게 선택을 맡기셨고,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사실, 그때는 별로 아프지 않았고 기운도 있었기 때문에 '힘들긴 하겠지만 얼마나 힘들겠어' 했다.


문제는, 응급수술을 진행해야 할 수도 있어 금식 명령이 떨어졌고 양수가 터진 상태라 자궁문 열리는 속도가 느릴 수도 있다는 점. 그래도 괜찮겠지 했는데...


진통 3-4시간부터 본격적으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명상하듯 알아차림과 호흡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먹히는 것 같았다.


진통 7-8시간이 넘어가며 급격하게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금식으로 인해 배가 고파 기운도 빛의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배고프면 아무도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왜 생각 못했을까. 게다가 호흡이고 뭐고 소용이 없어지기 시작. 그저 통증이 오면 온몸으로 쥐어짜며 버틸 뿐이었다.


늦은 오후 양수가 터진 걸 확인한 후 자정과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오던 즈음, '수술해주세요.' 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아픈데 아직도 자궁문이 다 안 열렸고,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거라는 말에 포기. 수술실에 실려가면서는 '마취 먼저 해주시면 안 되나요'라고 했던 말이 마지막으로 기억난다. (대학병원에서 출산했는데 당시 의료파업으로 무통도 없었다.)




그렇게 출산 다음날 아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낯선 아기의 모습에서 가장 낯선 건 머리에 난 혹이었다. 아기가 내려오려고 애쓰다 골반에 끼어있던 시간이 길어 머리에 두혈종 또는 산류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큰 편이라곤 했지만 그럼에도 너무도 작은 아기 머리에 난 혹에, 눈물이 났다. 호르몬으로 들썩이던 시기였다.


며칠 내로 사라질 수도 있다고 했지만 퇴원할 때까지 그대로 있었고, 소아과에서는 2주 후 뇌초음파를 예약해 주었다. 괜찮을 거라 보지만 혹시 모르니 정확히 확인해 보자고.


다행히 아기는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울고, 또 잘 놀았다. 그럼에도 아기를 볼 때마다 자책이 일었다. 괜히 자연분만 한다고 해서 아기만 고생시키고, 이 작은 머리에 혹이나 달아주고. 왜 그렇게 버텼을까, 그냥 바로 응급수술 할걸. 아니면 조금 아파오기 시작했을 때 바로 수술해달라고 할걸... 그러다 애꿎은 담당선생님에 대한 원망도 일었다. 왜 더 강하게 수술을 권하지 않으셨을까, 왜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얘기를 안 해주셨을까... (나중에 알게 되긴 했지만 선택제왕을 한 경우에도 종종 생길수 있다니, 진통 때문만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러다 보면 두혈종, 산류로 검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왠지 긍정적인 결말보다는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을 우리 뇌가 좋아하는 것인지 보기도 힘든 사연들만 더 눈에 들어왔다.


꼼지락거리는 아기를 보며, 잠든 아기를 보며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 생각은 또 감정을, 그 감정은 부정적인 미래상을 끌고 오길 반복했다. 아기의 머리 혹은 현재 실재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생각이나 감정, 상상들은 다 부질없는 것이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또 감정이 뒤따랐다. 이 못난 어미가, 참 한심하다. 뭐 하러 고생하고 애기까지 힘들게 했나. 참 나쁘다...


그럴 때마다 때로는 금방, 때로는 늦게 알아차렸다. 아, 내가 또 생각에 끌려가고 있었구나. 두 번째 화살을 쏘고 있었구나. 그래서 지금 눈앞에 있는 아기와 함께 있어주지 못했구나.


명상은 보통 힘들 때 생각이 나는데, 수련은 건강할 때 해두어야 한다는 말이 다시금 이해가 됐다. 이럴 때 써먹으려면, 먼저 연습을 해뒀어야 할 테니.


그래서 그때마다 명상을 했다. 눈을 감고, 혹은 아기의 온기를 가만히 느끼며 호흡을 하다 보면 생각도 감정도 고요히 잦아들었다. 다시 아기와 함께, 그 순간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갔고, 초음파 결과 다행히 아기의 뇌는 깨끗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두혈종은 아기의 두상이 커지는 것과 함께 다듬어지는 것이기에 외관상으로 말끔해지기까지는 2-3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아기의 머리에는 여전히 혹이 있고 때문에 볼 때마다 마음 한 편이 아린다. 우리 귀여운 아기, 엄마가 괜히 고집부려 미안해.


그럴 때면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몇 차례 다듬어 본다. 그렇게 명상과 함께, '우리 아기도깨비' 하며 아기의 곁에 온전히 있어주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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