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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글마음 Mar 08. 2023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

불안을 딛고 일어서라

'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안에서 알을 깨고 나오려고 두드리는 것과 밖에서 돕기 위해 두드리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어미만 쪼면 알 안에 있는 병아리가 죽고, 안에 있는 병아리 혼자 알을 깨려고 하면 힘에 부쳐 죽는 경우가 있다. 이 사자성어는 사제지간의 인연에서 스승의 예리한 능력을 비유할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청출어람'과 비슷하게, 좋은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성장시킨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에 이런 말이 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아브락사스는 이분법적인 세계 인식을 하는 상징이다. 데미안은 헤르만헤세의 자서전이고, 헤세가 죽기 직전 정신분석학자 칼 융을 만났다는 점에서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이분법적인 세계를 통합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융의 대극의 통합이란 개념으로부터 받은 영향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로,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통합하는 중년의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헤세 역시 고민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나 다움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나답게 살기 위한 애씀이 어쩌면  수많은 '파이어족', '딩크족' 등을 만들어 냈던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천년전이나 백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답게 사는 것이 힘든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자만함에 갇히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리라. 신은 인간에게 완벽함을 주지 않았다. 인간이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순간 바벨탑을 쌓아 언어가 분열된 사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있다. 신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할 목적. 인간은 신을 찾도록 지음 받았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완벽해질 수 없고, 불완전하기에 서로 도와야 하며, 불완전한 사람들을 의지할 수 없어서 완벽한 신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섭리이자 자신의 세계를 초월하여 자신의 창조목적대로 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불안을 느끼며 사는 존재다. 뭉크는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성적 의식에 집착했고, 불안이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정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불안의 근원은 파악하기 어렵고, 집착할수록 더 무기력해졌기 때문이다. 뭉크의 <불안>,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 <절규>등을 보면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불안의 개념>을 쓰면서, 실존주의 철학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 속에서는 진리와 주관적 진리를 구분이 필요하고,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믿느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실조의 3단계를 언급하였다. 미학적 단계(순간의 아름답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도망침), 윤리적 단계(나다움을 선택하여 삶의 원칙을 정하고 통제력을 가지려고 함), 종교적 단계(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삶을 추구하여 신과 일대일로 만남). 궁극적으로, 키에르케고르는 뭉크에게 영향을 주었고 둘은 우리에게 신 앞에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초월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자기에게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키에르케고르- 

고민하는 사람의 가장 큰 위안은 고민이다. 고민함으로써 자신의 퇴행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뜻이며, 고민하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뜻이다.
-카렌 호나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수용할 때 절망하고, 그것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신 앞에 서 독대하는 것. 그것이 나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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