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훈 Sep 15. 2023

핵융합보다 제어하기 어려운 냉난방 조절

feat. 기관사 드라이에이징

기관사들의 가장 큰 고충을 뽑아서 Top10을 선정한다면, 쟁쟁한 참가자들이 많다. 그중 ‘가장 은근히[사실 짜증 나게] 신경 쓰이는 고충 Top1’ 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우승자를 뽑는다면 가장 유력한 참가자는 바로 ‘냉난방 조절’이다.

냉난방 조절로 말할 거 같으면, 그 까다로움과 극도로 제어하기 어렵다는 특성으로 인해, 기관사를 때려치우고 핵융합 박사과정까지 마친 뒤 핵융합 연구 개발자가 된 선배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면 말고 뭐]


냉방과 난방 중 냉방이 특히 까다롭다.

적당히 틀면 덥다, 그래서 세게 틀면 춥다.

덥다는 민원과 춥다는 민원이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마냥 미친 듯이 솟아오른다.

억울한 게 나는 동전을 넣은 적도 없는데 솟아오르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게 기관사는 냉난방이라는 두더지 게임에 대해 강제로 게이머가 된다.

돈을 넣지 않았지만 이것들은 솟아오른다.

춥다는 민원과 덥다는 민원이 아무것도 솟아오르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뭐지? 어떤 게 솟아오르려고 이리도 숨 막히게 조용하지?’


그런데 만약 이 냉방기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20년도 넘은 고물 지하철, 거기에 기생하는 냉방기.

설마 이 냉방기만은 고장 나지 않는 불사의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말도안되는 정상적인 냉방기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만약에라도 있다면, 해리포터부터 읽고 오길 바란다. [이 지하세계에서 멀쩡하고 정상적인 냉방기는, 드래곤이나 불사조처럼 실존하지 않는 전설적, 판타지적 존재이기에]


고물 지하철에 고물 냉방기, 거기에 지구온난화[빌어먹을 탄소중립 좀 하자]로 인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의도가 명백해 보이는 폭염.

고장이 안 나겠는가? 이 냉방 장치는 꼭 특히 더운 날, 특히 덥고 사람 많은 시간에 고장이 난다. 냉방기 고장은 어떻게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만 벌어질까? 이건 음모가 분명하다. 이 음모의 주체를 찾아낸다면 망설임 없이 한여름에 최고급 구스다운 패딩 점퍼[수지가 광고하는]를 입혀 내리꽂히는 태양 아래 방치한 뒤 따뜻한 아메리카노만을 급여하는, 인간이길 포기한 가장 잔혹한 형태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관사로서 특별히 두려운 부분은, 운전실의 냉방을 따로 설정할 순 없다는 것이다.

객실의 냉방을 설정하면 운전실은 그걸 공유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승객들은 더울 수 있지만, 하루 종일 냉방기 아래에서 드라이에이징[고기를 일정 온도, 습도, 통풍이 유지되는 곳에 노출시켜 숙성시키는 방법]을 당하는 기관사로서는 고역이다.

바람이 나오는 모든 구멍을 막아보지만 이 망할 바람은 또 어디선가 새어 나온다.

나는 그저 잘 숙성된 찰진 고기가 되어갈 뿐이다.


반대로 뜨거운 여름날 태양 아래서 태닝을 즐기다, 계획과 달리 갑작스레 출고[차량기지에 쉬고 있는 열차를 점검해서 본선으로 끌고 나가는 것]해서 일을 하게 되는 열차들은 자연 불가마 상태이다. 그 불가마 열차로 승객들을 운송해야 하는 기관사는 그 순간부터 열차 아이싱을 시작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기관사는 익어간다.

정확히 기관사 시어링[고기의 겉 부분을 강한 불에 재빨리 굽는 것]을 위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드라이에이징에 시어링까지…

소금과 후추로 시즈닝만 추가하면 기관사는 고든램지가 구운 완벽한 스테이크에 버금가게 맛있어질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승객들은 열차를 이용하러 온 것이 아니라 ‘기관사 스테이크’라는 메뉴가 시그니처인 ‘부산지하철’이라는 레스토랑을 이용하러 온 손님인 것이 확실해진다.

[기관사가 고기라면 나는 개인적으로 한우투쁠급의 우수 육질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고로 우리 ‘부산지하철’ 레스토랑은 오로지 고기:스테이크 로만 승부하는 곳이므로, 파스타 손님은 사절이다.]




기관사의 냉난방조절처럼 맡은 바 본분을 잘 해내었을 때,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이런 일들은 평소처럼 해내지 못했을 때, 그제서야 그 일의 필요성이 드러나게 된다.


냉난방 조절로 대변되는 기관사로서의 일들도, 평화로울 때는 드러나지 않는 UDT/SEAL 대원으로서 임했던 일들도.

마치 시계가 멈추었을 때야 자각하는 건전지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부재하게 되었을 때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하철의 냉난방이나 시계의 건전지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건강이나 사랑, 가족, 친구, 내 영혼 같은 소중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기기 쉬운 것들의 건전지가 다 닳았다면.

단순히 불편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편보다는 불행의 시간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든 건강이든 뭐든, 건전지를 미리미리 갈아두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관사인 나는 오늘도 냉난방 조절에 목숨을 걸어본다.

이전 07화 자살에 대한 기관사의 고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