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훈 Sep 18. 2023

자살에 대한 기관사의 고찰

자살 : 생명체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

세계보건기구(WHO)는 ‘스스로 품은 의지를 통해 자기 생명을 헤쳐서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자멸 행위’로 자살을 정의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상위권이며, 매년 10,000-15,000명이 목숨을 끊는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내가 주체가 되어 의지를 가지고 어떠한 생명을 끊어낸다.

불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구체적인 나의 생명을. 나의 행동으로.

내가 직접 실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쉬운 일일까?

절대 쉬울 수 없다.

분명 자살의 주체가 되는 본인에겐 생명보다 커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그리고 사회양극화, 눈덩이처럼 불어버린 부채.

경쟁, 구직난, 생활고.

사업실패 혹은 무직.

누군가의 괴롭힘, 따돌림, 갑질, 병영부조리.

실패한 사랑 혹은 결혼.

대입이나 취업에 실패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비추어지는 현실.

학생들을 벼랑 끝으로 내미는 학교폭력과 진학 문제,

그런 아이들을 지켜야 할 선생님들조차 위협하는 땅에 떨어진 교권.

사회의 그늘에 놓인 노년층들.

조울증, 조현병, 공황장애, 트라우마 같은 정신질환.


자살을 지지해 주는 구체적이며 명확한데다가 실제적인 이유들.

이 이유들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관점을 바꾸어 보자면, 이러한 실제적이며 실질적인 이유들 속에서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자살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자살이 자연스레 스며있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가 말이다.

“어떤 사람이 자살했대…”

“저런… 근데 왜 그랬대?”


2021년 총 자살자 수 12,975 명.

1일 평균 자살자 수 약 36 명.

오늘도 자살을 할 36 명.

그중 한 명을 따라가보자.




우리가 노출된 숱한 이유 중 하나로 인해 특히 삶이 힘든 A.

A의 삶에는 빛이 없다.

조그마한 빛이라도 내리쬔다면 그 얇은 빛을 동아줄 삼아 오르겠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잔인하리만치 어둡다.

누군가 A에게 허락된 빛을 다 앗아가버린 건지 A에게는 빛이 없고 어둡다.

그런 A가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생명을 끊기로 했다.

전혀 이질감 없는 전개다.


여러 방법을 찾던 중 기차 자살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삶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몇백 톤의 중량을 가진 기차가 확실한 죽음을 보장했다.

또한 신뢰성과 정시성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기차이기에,

혹시 죽음의 순간에 망설일지 모를 자신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자살사이트를 보니 xx역, xx역 등 자살 명소로 평가받는 곳들이 있었다.

A는 그중 한 역을 택했다.

곡선구간과 시야를 가리는 나무, 내리막길 등으로 인해

기관사가 뛰어들려는 사람을 확인해도 속도를 줄일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한 어슴푸레한 새벽.

몰래 선로에 들어간 A는 선로 위로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보며 못다 했던 생각들을 하며 걸었다.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 불빛은 느린 듯 빠르게 점점 커지고, 이내 가까워졌다.

불빛은 아직 A의 존재를 몰랐다.


빵!!!빠아앙!!빵!! 끼이익.끼긱.끼기긱.


불빛이 A의 존재를 알아챘다.

하지만 저 불빛이 바꿀 수 있는 결과는 없었다.

A에게도 망설임이 조금은 있을지 몰랐지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었다.




이번엔 또 다른 사람 B를 따라가보자.


삶이 힘든 이유야 많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기적을 택한 B.

그 힘든 삶에 동아줄이 되어줄까 하는 마음에 선택한 직업 기관사.

결심하기까지 한참이 걸렸고, 기관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지 수년이 흘렀다.

열 번이 넘는 크고 작은 시험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기할까 생각한 시간도 분명 존재했다.

통과해야 할 시험보다 지쳐가는 본인의 모습에 겁이 났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삶을 이어가던 어느 날.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어둠에 비친 빛 혹은 동아줄이 되어줄지 모르는 기관사라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B를 옥죄어 오던 삶.

이제 가까스로 숨통이 트인 B.

순탄했다. 아니 순탄하다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간의 삶이 고단했기에, 상대적으로 순탄하다 느낀 것일지 몰랐다.


야간 근무를 하게 된 날.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아직 어둠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을 때, B는 피곤했지만 일어났다.

새벽에 움직이는 첫차들을 운행하기 위해서였다.


도시의 하루에 시작과 끝이 있다면, 첫차와 막차가 아닐까?

피곤했지만 도시의 아침을 깨우기 위해 운행을 시작했다.

도시의 아침을 깨우고 퇴근한 뒤에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단했지만 보람찰 수 있었다.


그렇게 운행하던 중 선로에 작은 불빛이 보였다.

이상했다.

있어선 안되는 불빛이었다.


빵!!!빠아앙!!빵!! 끼이익.끼긱.끼기긱.


즉시 비상제동을 걸었고, 경적을 미친 듯이 울렸다.

지금 이 시간에 작업자가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 불빛이 사람 같은데 저 사람이 직원인가?

하지만 직원이 이 시간에 안전장비도 없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도 열차는 멈춰지지 않았다.


금방이었다.

사람을 치는 게.

속으로는 제발 멈춰라 멈춰라 간절했지만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까마귀나 새들이 부딪혀도 소리가 크게 나는데,

그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랐다.

쿵.

그 찰나의 순간, 1초는 될까 하는 시간에 그 잊히지 않을 소리가 났다.

아직 멈추지 못한 열차는 그대로 한참을 더 가서야 멈췄다.


고요했다.

사람을 쳤다는 건 오로지 혼자만이 알고 있었다.

세상과 주변은 아무도 몰랐고, 일상적인 무전이 흘러나왔다.

이 상황을 알려야 하는 입이 타들어갔다.


관제에선 내려서 확인하라고 했다.

직접 확인해야 했지만,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까이 가보니 검은색 형체가 쓰러진 채로 있었고 옆에 떨어진 핸드폰에선 빛이 흘러나왔다.


멍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근무를 마친 후 동기들이 위로차 모임을 가져줬다.

위로휴가 5일을 부여받았고 고향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심리 상담을 했고, 열흘 정도의 휴식을 가진 후 근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쉬울 리 없었다.

특히 야간이 힘들었다.

선로 옆에 조그마한 신호기나 표지판이 멀리선 꼭 사람같이 보였다.

역을 통과하는 급행열차를 운행할 때 사람들이 안전펜스에 조금만 가까이 서도 신경이 곤두섰다.


시간이 지난 후 그날에 대해 묻는 나에게 형이 말했다.

“왜 거기에서 있었을까?

 그때 당시에는 그 사람이 미웠어.

 왜 안타깝게 거기에 와서 차에 부딪힐 일을, 본인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20대 젊은 남자였다네.

 젊은 사람이라서 또 안타깝고 그러네.

 처음에는 원망했지만 나중에는 안타깝고 그랬지.

 그나마 다행인 건 부딪힐 때 나를 마주 보지 않아서 얼굴을 못 봤다는 거.

 또 시신의 얼굴은 확인하지 않았던 거.

 봤었다면 트라우마가 되게 심했을 거 같은데,

 지금도 그 상황이 생각나지만 얼굴은 안 봐서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 기관사 동기들 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형의 이야기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얘기들을, 내가 아는 형의 담담한 말투로 내게 전해줬다.

형이 두터운 사람인 걸 알았기에, 담담한 형의 말투에 마음이 미어졌다.

내 가까운 사람의 일이었기에, 남일이라 치부하고 외면했던 것이 순식간에 내 일이 되었다.

나는 형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




(고) XXX 기관사 분향소

‘부디 편히 잠드시길

 언제나 성실하게 근무했던 기관사.

 동료들과 늘 밝고 따뜻하게 지냈던 기관사.

 가정의 화목을 가장 중시하던 자상한 가장이자 세 딸의 아빠였습니다.’


내가 처음 접한 기관사의 죽음이었다.

사상사고를 겪은 선배 기관사였고, 거기서 비롯된 아픔으로 스스로 생을 끝냈다.


같은 곳에 근무하던 다른 선배는, 예전에 사상사고를 겪고 힘들어했었다.

어느 날 열차를 운행하던 중 승강장에서 이유없이 갑작스레 쓰러진 승객을 보고 관제에 보고하여 승객을 살폈지만,

열차를 운행해야 했던 그 선배는 그 승객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 없었고, 그날 더 이상 근무를 하지 못했다.

대기하던 대기 기관사가 대신 그 일을 마무리했고,

그 선배는 그날 이후 아직 운전업무를 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어떤 기관사는 사상사고를 겪은 후 힘들어하다, 9년 후 동료가 운전하는 열차에 투신해 삶을 마감했다.

이외에도 사상사고를 겪은 기관사들의 자살 소식은 그리 드문 얘기가 아니다.


여객열차의 역 진입 속도는 약 60km이다.

이때 비상제동 시 제동거리는 빈 열차 기준 약 128m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KTX의 경우 정상 운행 중 비상제동 거리는 약 3.3km로 약 1분 40초가 소요된다.

그 말은, 기관사는 사람을 인지하고 비상제동을 걸고 간절하게 기적을 울리면서도, 사람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을 치고도 몇십 미터부터 몇 km까지, 몇 초에서 몇십 초 혹은 일분 이상까지 끌고 가야 한다.


그들은 꼭 눈을 마주친다고 한다.

선배 기관사들이 말하기에 뛰어내릴 때 눈을 보면 꼭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원망이 아닌 후회가 느껴진다고.

그래서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한다.


당장에 그 눈길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을지 모르지만

눈길을 마주한 기관사의 삶은 그날부터 바뀐다.

그날부터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 눈길을 본 이후의 삶이.

자살한 사람의 죽음에 마치 본인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이.

혹은 본인이 죽였다고 느껴지는 삶이.

결코 그렇지 않음에도.




그래 결국 모든 건 자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사회의 일부분일지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나와 내 동료들, 친한 형 누나 친구 동생들.

우리의 삶을 망가뜨릴 정당성이 그들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의 의지 따위는 중요치 않은, 오로지 그들의 의지만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망가뜨림이.


우리의 바람이라면,

우리의 열차에는 의미 있는 것들을 싣고 싶다.


열차는 거대한 전압을 받아들이는 온갖 크고 중요한 장비들부터 냉난방기와 작게는 볼트 너트 하나까지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작은 볼트 하나라도 없으면 그 커다란 열차는 제구실을 할 수 없다.

크고 작은 부품들이 빠짐없이 모여 열차를 이루어내듯, 세상을 구성하고 이루어내는 그런 의미 있는 것들을 싣고 싶다.


활기찬 하루, 일상, 친구들과의 만남, 사랑하는 사람과의 나들이.

혹은 고단한 일상과 퇴근길, 힘들었던 하루, 누군가의 슬픔을 달래주러 가는 길.

행복, 사랑, 슬픔, 애환, 보람.


결코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절망을 태우고 싶진 않다.

아니, 절망에 부딪히고 싶지 않다.


때론 절망을 태우기도 하고,

여러 의미 있는 것들을 싣기도 한다.

혹시 또 절망을 태우게 되진 않을까 걱정되고 무섭지만,

내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거.

그러니까 안타깝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결국엔 받아들이고,

오늘도 우리는 열차를 운행한다.

이전 06화 알람1, 알람2, 알람3, 알람4, 알람강박증on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