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할까
나는 요즘 사춘기에, 늦어도 20대에는 멈추었어야 할 거 같은 질문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이상적이 기라기엔 너무 속물이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기엔 너무 낭만적인. 그래서 이도저도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삶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너무 싫었다. 뉴스를 만드는 내 직업이, 시사방송 작가로 기자로 10여 년을 일했는데 온통 부끄러운 일 투성이었다. 말도 안 되는 사람을 출연자로 자리에 앉히고, 거지 같은 말을 대중에 전달하고. 그것들이 사회를 망치는 걸 뻔히 알고 눈으로 보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비교적’ 괜찮다는 언론사에서 ‘비교적’ 편파적이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사명감 따위는 그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자괴감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서울 밖으로. 그렇지 않으면 관성에 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버릴 것 같았으니까.
다 바꾸고 싶었다.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생소한 사람들과의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에 맞춰 나의 설정값도 변경했다. 페미니스트, 세미비건이라는 가치관과 지향성을 내려놨다. 그냥 서울에서 내려온 까탈스럽고 똑똑한 척하는 여자.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다.
괜찮았고, 계속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문득 서글퍼지는 순간들이 쌓였다. 무엇을 위해 나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를 부정하는 고통을 감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일을, 심지어 진실을 교묘하게 숨기고 돌려서 말하는 대가로 세금을 받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토록 혐오했던 계급주의자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고 동조하는 내가 낯설었다.
물론 편한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무서웠다. 닮을까 봐, 순응할까 봐. 나 하나 변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점차 싫은 일들 앞에서 참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안락함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결정의 순간이라는 벼랑 끝에 나를 세웠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먹고사니즘이 발목을 잡는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는 일뿐이라 지방에서는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애매하게 많은 나이는 물론, 과거의 경력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백수 3개월 차. 내가 정한 마지노선. 지금 내게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지역에 그냥 자리를 잡고 뭐가 됐든 먹고살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 과거 경력을 이어가거나. 다행히 선택의 기준은 분명하다. 나는 앞으로 적어도 40년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근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밤잠을 설치며 스스로에게 묻고 있지만, 섣불리 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잘‘ 살고 싶은가? ’잘‘의 기준은 뭐지? 돈? 명예? 얼마나 벌어야 잘 사는 거지? 내 선택에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다시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어쩌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쯤 되면 누가 좀 정해주면 좋겠다. 넌 그냥 이렇게 살라고.... 한데 내가 과연 그 말을 들을까? 그걸 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