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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글 Jul 27. 2023

한밤중의 대나무 숲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걸려온 전화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친구의 장난전화일 거라 믿고 있던 난 예상치 못하게 들려오는 낯선 남자 목소리에 많이 당황했었다. 오래된 일기장을 보다가 떠오른 어떤 밤의 기억.


2008년 2월 11일


"안녕하세요, 너무 죄송한데요.. 혹시 지금 시간.. 있으세요?"

"네? 누구세요? "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제 얘기 좀 잠깐 들어주실 수 있나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아요."

"저, 잘못 건 게 아니고요. 사실 제가 오늘.."


내가 경계하자 자신을 스물두 살 대학생이라 밝힌 그는 오늘 너무나 괴로운 일을 겪었고, 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친구들에게는 차마 풀지 못한 이 답답함을 어딘가에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 번호나 눌렀는데, 그 전화를 내가 받은 것이라고 했다. 장난전화인지 의심할 틈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들어만 달라고 했다. 졸지에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대나무숲이 되어버렸다.


그에게는 첫눈에 반해 2년 동안 사귀어 오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최근 들어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그녀의 마음이 전 같지 않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날은 우연히 길을 걷다,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손을 잡고 있는 이가 자신의 남자친구라며 되려 당당한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와버렸고, 그럼에도 아직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남자는 울먹거렸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나도 화가 나는 것이다. 에라 세상에 뭐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다 있나 싶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말했다.


"그쪽이 잘못한 게 없다면, 그 여자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한때 2년이나 만나 사랑했던 사람에게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세요. 더 좋은 사람 만나실 수 있어요! 힘내세요."


연애 경험이 전무했던 그때의 내 나이는 열아홉,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짝사랑만 해봤었는데 나보다 2살 많은 대학생 오빠의 무려 연애상담을 해 준 것이다. 최대한 어른인 척하면서 편을 들어 주었다.


그렇게 10여 분 넘게 통화했을까. 이야기 들어줘서 한결 속이 후련해진 것 같아 고맙다는 말과 응원의 말을 주고받으며 전화를 끊고 나서는 생각했다. 참 별일이 다 있다 싶고, 그 와중에 이렇게라도 어딘가에 고민을 털어놓을 방법을 떠올린 그 남자가 기발하고 용감하게 느껴졌다. 그땐 나도 고민이 참 많았지만, 왠지 힘들다는 말은 입 밖으로 잘 뱉어지지가 않았다. 하긴, 군말 없이 들어만 주는 사람이 있다면 후련할 만도 하겠다.


차마 말로는 안 나오는 생각들에 잠겨 갑갑한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이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갑갑함으로 끄집어낸 그 기억의 끝은 왠지 좀 후련하기도 하고 훈훈하기도 한 기분으로 마무리가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곤 한다. 나에게도 참 고맙고 특별한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더 험한 세상이라, 아마도 이런 순수하고 여린 사람의 고민 전화가 걸려올 일은 더 이상 없겠지. 돌아보면 참 어리고 순수했다.


나도 편견 없이,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기억하고 새겨두어야겠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힘들 때, 누구에게 털어놓을지 몰라 끙끙 앓거나, 힘들다는 말을 하기 힘들어하며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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