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이 잔잔히 빛을 밝히던 어느 가을밤이었다. '카톡!'. 자정을 얼마 남기지 않고 울린 메시지 도착 알림음에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양쪽에는 내 쪽을 보고 잠이 든 딸 둥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집도 아닌 낯설고도 작은 호텔방에서 지낸 지 벌써 사흘째 밤이었다. 아직도 열흘이나 남은 격리기간을 떠올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다가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9월, 나는 갓 두 돌을 넘긴 두 딸아이와 함께 중국 베이징 근교 도시인 '천진'의 한 호텔에서 격리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 정부는 입국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철저하게 통제된 방역 정책을 벌였고, 국적과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들 정부에서 지정한 곳에서 2주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열악한 환경의 숙소에서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을 먹으며 몇 번에 걸친 코로나 검사를 통과해 음성 결과지를 받아 든 사람들만이 비로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희미한 독서등만을 켠 채 침대 위에 접이식 작은 테이블을 펴고 핑크색 삼성 노트북 덮개를 열었다. 작업 중인 동화책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방금 울린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하루의 노곤함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림 작가님에게 요청해 놓은 삽화 채색본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다정한 온도 덕분에 지친 몸과 마음이 위로받는 듯했다.
그해 봄, 구정을 쇠러 열흘 일정으로 한국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혀 몰랐다. 중국행 비행기를 여덟 달 후에야 간신히 탈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코로나가 한국을, 아니 전 세계를 덮치면서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중국 정부가 해외 입국자발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 국경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그해, 중국에서 지내다 잠시 한국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언제 뚫릴지 모르는 하늘길이 열리길 바라며 아직 중국에 남아 일하고 있던 몇몇의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다음 주면 괜찮아지겠지.' '설마 한 달 후에도 못 갈까?' 하던 염려가 무색하게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탑승한 중국행 비행기엔 아직 태어나서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아가들도 여럿 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각각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고 여기까지 왔을까?
감사하게도 우리 가족은 모두 함께 한국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고, 친정이며 시댁이며 도움을 주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의 멘털은 탈곡기에 털리는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일주일은 고사하고 하루를 시간대별로 나누어 촘촘히 짠 계획표대로 시간을 보내야 안심이 되는 '계획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예측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하는 불확실의 지뢰밭을 걷는 동안 출구 없는 블랙홀에 갇힌 것처럼 무척이나 괴로웠다. 평생 처음 겪어보는 팬더믹 앞에 나약한 나의 멘털은 파르르 떨리다 급기야는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나 자신의 정신줄을 잡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첫 아이(지만 쌍둥이)의 육아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말 한마디만 걸어도 펑펑 눈물을 흘리던 멘붕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나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다가 울며 잠드는 날이면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속상함과 답답함이 얼기설기 엉키며 눈덩이처럼 그 몸집을 부풀여갔다.
벌써 6개월 동안 친정집, 시댁을 전전하던 시점이었다.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은 한국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겠노라 에어비앤비로 따로 집을 구해 독립한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한지, 서로 안아달라며 울고 보채는 아이들을 겨우 재운 뒤 주방 한편에 놓아둔 컴퓨터를 켜고 타자기를 확성기 삼아 마음의 모든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깜박이는 커서의 숫자만큼 '뚝뚝' 눈물을 한 바가지 쏟으면서 말이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지.'
'왜 아무도 육아가 이렇게까지 힘든지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았었는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탓하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또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기만 한 것 같은 '엄마'로서의 나를 탓하면서 새하얗던 페이지를 까만 글자로 채워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던 영겁의 시간이 다시 제대로 흐르기 시작한 건. 내 안의 꽁꽁 엉켜있던 수많은 감정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면서 숨 쉴 틈이 생겼기 때문이었으리라. 덕분에 그날밤은 오랜만에 크게 '후-' 숨을 길게 내쉬고 홀가분하게 잠이 들었다.
깊은 밤 글이 되어 세상에 나온 내 속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벌건 대낮의 햇빛 앞에서 들췄을 때는 무척이나 멋쩍었다. 그냥 덮어버릴까 지워버릴까 고민했지만 한 여름밤의 꿈처럼 그저 지나처 버리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꿔먹었다. 볼품없이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던 이야기들을 조금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풀어내보기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육아 에세이로 다듬어 내보이기엔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비유와 상징을 담은 동화 형식으로 초보 엄마의 마음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칠게 쏟아낸 생각들이 동글동글 따뜻한 동화로 다듬어질 무렵, 갑작스럽게 받아 든 중국행 비행기표는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았다. 어서 빨리 책을 내야겠다며 다급해진 마음을 겨우 진정하고 부랴부랴 책의 삽화를 그려줄 그림 작가를 섭외했다. 글을 다듬으면서 한국에서 사모은 짐을 처분하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 나는 어느새 격리 호텔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침대에 앉아 마지막으로 글과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판사도 없이, 기다리는 독자도 없이 스스로 출간하는 '독립출판' 책이 될 테지만, 책에 담긴 위로와 진심은 그 어느 유명한 출판사의 책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초보 엄마의 마음을 담은 그림동화책 <세상에 없던 그림책, 엄마 마음 읽어주는 '엄마 동화'>(이하 '엄마 동화')는 2020년 11월 11일 출간되었다. 평생 동화를 써본 적도, 책을 내본 적도 없는 나였지만 나의 동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 무작정 300권의 책을 찍어냈다.
거창한 출간기념회도, 책을 홍보해 줄 출판사도, 나의 글을 기다리는 팬들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나 스스로 그 모든 역할을 기꺼이, 어서 빨리 감당하고 싶을 만큼 들떠있었고 행복했으니까. 과거 월급쟁이 회사원 시절, 억 단위의 광고비를 써가며 담당 브랜드의 신제품을 론칭하고, 홍보하고, 광고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막강한 엔도르핀이 쏟아져 나왔는데, 당연했다. 그것은 온전히 내가 품고 다듬어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였으니까. 나에게 중요한 건 유명세도 판매부수도 아니라 누군가 한 명의 마음에 따뜻함을 주고 싶다는 다정한 희망이었으니까.
책이 출간되던 날, 작은 케이크를 사서 가족들과 소소하게 축하노래를 부르고는 초를 껐다. 전국에 있는 독립서점 중, 책을 소개하고픈 서점 리스트를 추리고 메일을 보내 입고를 승인받아 네, 다섯 권씩 택배를 보내면서 매 순간마다 늘 한 가지를 소망했다. 글 한 줄에, 그림의 채도에 섬세하게 담아낸 따뜻함이 잘 전해지기를. 책은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치지도 유명해지지도 않았지만 간간히 보내주시는 독자들의 리뷰와 반응들을 보면서 매번 내가 더 감동하고 감사해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집을 떠나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나 자신의 밑바닥을 발견하는 것은, 육아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되었지만 그로 인해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 마음이 책이 되어 비슷한 처지의 육아동지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쩌다' 그림동화책을 출간했지만, 그 '어쩌다' 덕분에 무언지 모를 인생의 새로운 문이 열린 기분이 들었다. 아직 베일에 쌓여있어 흐릿하지만, 분명 나의 첫 책 <엄마 동화>의 탄생은 언젠가 내 삶 전체를 돌아보았을 때 커다란 전환점이 되어주는 특별한 사건이 될 것 같다. 그래서일까? 분홍색 표지에 당당히 서서 미소 짓고 있는 <엄마 동화>의 주인공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두근두근 기분 좋은 설렘과 행복함이 밀려온다.
▼해당 에세이는 팟캐스트에서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88857?e=24813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