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 온종일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습니다. 눈을 감고 정신없이 살아낸 오늘을 떠올려요. 아아, 역시나 쉽지 않네요. 요란하게 울려대는 세상 이야기들을 끊어내고 나니, 내일 해야 할 일들이 한가득 부풀어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힙니다.
'도리도리 후우-',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다시 한번 잠잠히 하루를 돌아봅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을 붙잡아 보려 해요. 귀를 사로잡았던 소리도요. 마음을 붙들었던 감정은 무슨 색이었는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하아-', 이번엔 얕은 숨에 옅은 탄식을 담아냅니다. 오늘도 정신없이 보낸 하루 끝에는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들만 남았네요. 이번만큼은 만족스러운 하루의 조각들을 건져 올리고 싶었는데 말이죠. 복잡한 세상에서 나를 잃지 않도록 많은 것을 꼭 쥐고 살아왔는데, 왜 손에 잡히는 것 없는 똑같은 하루를 보내게 되는 걸까요? 누군가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하루의 대부분이 뭉텅이로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콩나물시루처럼 빡빡했던 출, 퇴근 지하철 안에서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이 책 속에는 한 아이가 등장합니다. 흑백의 표지에서 혼자 싱그러운 색을 뿜어내는 아이가요. 오늘은 함께 이 아이를 따라가 볼까 해요. 뒷모습에서부터 생기를 가득 뿜어내는 그를 따라가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한 때는 아이였던 우리가 어른이 되며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말이죠.
제목 Title- The man with the Violin
저자 Author -Kathy Stinson
그림 Illustrator - Dusan Petricic
출판사 Publisher- Annick press
*한국어 번안책 :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 (출판사: 책과 콩나무)
The Man with the Violin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손꼽히는 조슈아 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입니다.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어느 대도시의 한 지하철 역에서 시작됩니다. 여느 거리의 악사들처럼 평범하게 차려입은 음악가는 이곳에서 43분 동안 바이올린 연주를 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지나친 1000명의 가량의 사람들 중, 연주를 들으려 발걸음을 멈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마저도 1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 모두 서둘러 제갈길을 가느라 바빴지요.
세상이 극찬하는 그의 아름다운 선율은 그렇게 아침의 분주함에 묻혀 사라집니다. 콘서트 홀에서는 한 자리당 100달러 이상의 값을 지불해야 들을 수 있는 세계적인 예술가의 연주가 끝난 뒤, 그의 바이올린 가방에 남은 건 고작 32.17달러뿐이었다고 해요. 이쯤 되면 그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연주를 했는지 궁금해지시죠? 여기 그때 당시 연주했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답니다.
2007년 1월 12일 워싱턴 D.C의 L'Fnfant Plaza 지하철 역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조슈아 벨
그날, 내가 그 지하철역을 지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면 연주를 들으려 발걸음을 멈추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거예요. 많은 경우, 이 예술가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겁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딜런'은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연주가 있던 그날 가던 길을 멈추고 음악가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던 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아이가 보이시죠? 무미건조하게 굳은 엄마의 표정도요.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땐 단순히 전체적인 그림과 글자를 읽는데 정신이 팔려있었어요. 양쪽 페이지에 짧게 적혀있는 두 문장을 지나 곧장 다음 페이지로 달려갔죠.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궁금했거든요.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와 두 번째로 읽기 시작했을 땐 완전히 달랐어요. 시선도, 마음도 가만히 멈춰 둔 채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니까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마음도 철렁했어요. 그제야 보였거든요. 엄마의 시선이 지나간 길고 긴 하얀 공간이요.
지나온 모든 것이 싱그러운 색으로 반짝이는 아이의 시선 위엔 그의 손을 잡고 서둘러 어딘가를 가고 있는 엄마의 세상이 보입니다. 다채로운 아이의 세상과 달리 엄마의 세상은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 텅 비어있어요.
여기서 깨닫습니다. 한 때 아이였던 우리가 어른이 되며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요. 그건 바로 '세상을 느끼는 감각'인 것 같아요. 목표만 향해 달려가는 어른들은 그 감각을 잃어버린 거죠. 엄마의 관심은 온통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에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낄 수도 없어요.성큼성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하루 끝에 커다란 공백이 남는 이유겠지요.
반면, 자신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엄마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딜런은 신이 나 죽겠는 표정입니다.신문을 거꾸로 든 할아버지, 양쪽 발에 다른 색의 장화를 신은 또래 아이, 물고기대신 뼈다귀를 물고 있는 고양이라니... 끽끽 대며 웃을 만한 그 모든 것들이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세상의 재미난 모든 것을 기억에, 마음에 담기에 아이의 하루는 다채롭고 풍요로울 수밖에 없어요. 아직 '세상을 느끼는 감각'을 잃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아이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의 움직임을 보고 듣습니다. 단조로운 흑백의 세상을 사는 어른들은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요.
"Please, Mom? Can't we stop? Please." If only they could listen for even a minute!
"Not today."
그곳을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튕겨내 버린 아름다운 선율을 아이는 온전히 마음속에 담아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앞다투어 듣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뮤지션이 연주하는 음악을요. 그러니 잠들기 전,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루가 시시하다고 푸념할 수 있겠어요? 매일매일이 이렇게나 다채롭고 멋진데요.
딜런 덕분에 온갖 해야 할 일에 몰입해 있던 엄마도 서서히 긴장을 풀어요. 그리고 둘은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춥니다. 그렇게며 이야기는 끝을맺지요.
바쁜 아침, 습관처럼 서둘러 걷다 문득 의식적으로 걸음의 속도를 늦춰봅니다. 보이진 않지만 굳어있던 표정을 풀어내곤 주변 이곳저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지나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 밤엔 '어제보다는 조금 더 풍요로웠던 하루였다.'라고 미소 지을 수 있게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느끼는 감각'을 깨워봅니다. 나로 인해 내 옆에서 잠든 그이의 감각도 함께 살아나길 바라면서요. 딜런과 그의 엄마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