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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pr 08. 2020

“벤, 잘 싸워랏!”

<이겨라 벤> 투견이지만 괜찮아!

   제가 다니는 회사는 창립한 지 60년이 더 지난 곳입니다. 1953년 전쟁 폐허 속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니 참 오래됐죠. 저도 과거로 돌아가 30여 년, 근 40년 전에 처음 봤던 만화를 기억에서 꺼내 보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공식적으로 만화책을 사주셨던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7살 겨울 무렵이었습니다. 고래잡이 수술 후 통증을 잊기 위해서라며 ‘소년중앙’을 보고 싶다고 했죠.(당시 소년중앙, 보물섬 등 만화책 보는 친구들이 엄청 부러웠나 봅니다.) 그 시절에 접한 만화가 <이겨라 벤>입니다.     


   풍산개 혈통의 새끼를 가진 벤(주인공 벤의 어미 개)은 교통사고로 주인을 잃고 떠돌이 개가 됩니다. 굶주림과 다른 개들의 공격 등으로 지친 벤은 견생(犬生) 말미에 꼭지란 소녀를 만나 그 곁에서 새끼를 낳고 죽습니다. 개를 싫어하는 아버지는 집에서 태어난 강아지가 달갑지 않아 바로 내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일찍 잃은 꼭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강아지가 불쌍할 수밖에 없죠. 어미 이름을 따 벤이라 이름 짓고, 정성껏 키웁니다.

   미숙한 벤은 사고뭉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잘한 말썽을 일으키던 벤은 쥐를 쫓다가 집을 불태우는 사건을 내고, 아버지마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합니다. 입원비를 마련코자 신문 구인란을 펼친 수철(꼭지의 오빠)은 때마침 투견대회 안내문을 보게 되고요... 거기서부터 여러 개와 늑대, 곰 등과 싸우는 투견 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지금이라면 소재 자체가 동물 학대 논란이 될 수 있겠지만, 1980년대 어린이 대상 만화책에 실렸던 것을 보면 당시는 문화가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꼭지네 막내인 말썽꾸러기 벤이 가족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기 역할을 해내게 되는 성장 스토리 같기도 하고, 낯선 동물을 통해 진정한 화목을 찾아가는 가족극 느낌도 듭니다. 투견을 기르는 사람들이 자기 개에 갖는 애정을 말하려는 듯 하기도 합니다. 작가(또는 출판사) 또한 ‘개와 인간 사이의 우정’, ‘개를 키우는 어린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따뜻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소 잔인하고 무섭게 여겨지는 투견 사례와 가족애·동물애·우정이 잘 연결되지 않는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개들을 의인화해 짖는 소리를 대사로 표현해서 그런지 사람 같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그 말을 사람이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야기 속 인물과 개의 심정을 동시에 접하게 됩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충성을 다하고 호랑이·늑대와도 용감히 싸우는 개의 특성, 투견 조련사들의 직업윤리 등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투견인 동시에 꼭지네 반려견인 벤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 듭니다.     


   사실 저는 개를 참 무서워합니다. 대여섯 살 때인가 어느 공원에서 저를 잡아 물 듯이, 쏜살처럼 달려왔던 개의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습니다(무섭다고 뛰어 도망갔으니 더더욱 따라붙었겠죠). 초등학생 시절 작은 마당에서 ‘멍순이’란 이름의 개를 키웠는데, 그렇게 저를 잘 따랐건만 집에 들어갈 때마다 겁이 났을 정도였습니다. 가끔 목줄이 풀려 멍순이가 마당을 활보할 때면, 친구를 불러서 그 친구가 담을 넘고 들어가 목줄을 채워야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기억 속의 <이겨라 벤>은 엄청난 개싸움이 그려진, 무서운 만화였습니다. 광기로 침을 흘리는 도사견이 벤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모습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소년중앙이 있는 친구 집에 가면 꼭 찾아봤던 기억이 있습니다(우리가 공포영화를 이런 심정으로 보는 것일까요?).  


   2011년 <이겨라 벤>을 그린 이향원 작가가 별세했다는 기사를 접한 후, 문득 유년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2002년 세 권짜리 재발행본이 온라인서점에 남아있는 것을 찾고는 구매했었지요. 그래서 <이겨라 벤>은 현재 제 기억 기준, 초등학교 입학 전 봤던 만화책 중 기억나는 유일한 작품입니다.  커서 다시 보니 감동과 교훈이 있는 아동 만화입니다. (앞부분에 쓴 줄거리 및 평가는 최근 다시 읽은, 어른 느낌으로 적은 것입니다.) 벤은 그냥 어린 강아지고요. 제 기억 속에서는 분명히 드라큘라 같은 날카로운 이빨, 물어뜯긴 살점, 낭자한 핏방울... 이런 게 가득했던 공포스러웠던 만화였거든요. 어릴 적엔 개싸움만 보였었기 때문인지, 띄엄띄엄 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개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됐을 수도 있겠고요. 그 시절보다 자극적인 대상에 덜 민감한 어른이 됐다는 것, 사람의 시각은 시절과 나이에 따라 바뀐다는 것. 이 두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겨라 벤>이 그걸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신입사원 시절, 선배들이 극찬했지만 제 생각엔 감동도 재미도 없다고 여겼던 책들.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진심으로 감싸고 아끼면 깊이 있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벤을 내다 버리라던 꼭지 아버지마저 어느새 벤을 한 가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과는 부산물일 뿐, 한마음으로 “이겨라 벤!”을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세권으로 구성된 <이겨라 벤>(2002). 1983년부터 소년중앙에 연재됐던 작품을 편집, 재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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