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ven Lim Apr 16. 2020

“먼저 던지지 않으면 캐치볼은 시작할 수 없어요”

<바텐더> 사람과 사람 사이

   2020년 설 연휴 마지막 날, 휴식을 취할 겸 산책을 하다가 기분 좋은 커피향이 풍기는 연희동의 자그마한 카페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듯 몇 종류의 책들이 진열된 중앙 테이블 주변의 벽을 따라 놓인 좌석에 몇몇 고객들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희가 주문한 커피를 무척 정성껏 내려주는 카페주인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연희동 작은 카페에서 <바텐더>를 만났죠! 미스터 초밥왕 사이의 두 권 보이시나요?

   커피를 기다리며 매장 안의 책들을 둘러보던 차에 눈에 들어온 <바텐더>. 다른 서적들은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만화는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발행연도가 사원·대리 때인 걸 보니... 뮤지컬 등 공연문화를 즐기느라 정신없던 시절이었고, 별 관심 없는 술 얘기라고 여기고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일전에 흥미롭게 봤던 <소믈리에르> 작가의 작품에네요. 매장에 책이 두 권 있었는데, 순식간에 빠져들어 몰두하게 됐습니다. 읽는 사이 커피를 가져온 주인이 한 마디 건넵니다. 


   “재미있으신가요? 저희 업종 사람들에게는 바이블과 같은 만화책입니다.”      


   이 말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작품인지 확인하고 싶었죠.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온라인 중고서점을 검색해 21권짜리 완결본임을 확인하고는 바로 구매했습니다. (덤으로 다른 책들도 조금 더 샀습니다!^^) 당시 생각으로는 집에 배송되는 대로 다 읽을 참이었는데, 이번 국회의원 선거 휴무일을 맞아서야 책장 속에서 잠들어 있던 책들을 꺼내 보게 됐습니다.     


   칵테일바의 바텐더, 바텐더를 찾는 고객들, 그리고 바에서 내놓는 술을 소재로 한 만화입니다.


   유럽에서 개최한 칵테일 콘테스트의 우승자이자 ‘신의 글라스’로 일컬어지는 사사쿠라 류. 프랑스 파리의 호텔에서 근무하던 류는 바를 방문한 손님이 자살하는 사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책감을 갖고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이후 여러 바에서 사연 있는 고객들을 만나 상황에 맞는 칵테일을 제조해주고 격려하며 상한 마음을 치유해 줍니다. 더불어 여러 명의 업계 선·후배와 동료, 지인들을 통해 자신 또한 성숙해져 갑니다. 근무한 몇몇 바와 호텔, 그리고 독립해 오픈한 바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가 21권의 책 속에 담겨 있습니다.

     

   카페에서 같이 몰입감 있게 술술 읽힙니다. 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사연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있고, 명 한 명의 희로애락이 느껴집니다. 상처로 얽혔던 마음과 영혼이 칵테일(술)을 매개로 풀리는 이야기가 때론 따뜻하게, 가끔은 구슬프게, 또는 착잡하게 공감을 줍니다. 술의 종류나 스토리 결의 차이가 있어 직접 비교가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신의 물방울>보다 훨씬 짜임새 있고 마음의 울림을 주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고객의 마음을 여는 주재료로 술이 사용됐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카운터 건너의 손님을 바라보는 사사쿠라 류의 시선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객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라고 할까요? 술에 대한 지식과 칵테일을 만드는 기술에 앞선(물론 류는 이것도 아주 뛰어납니다), 바를 방문한 고객이 그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태도가 주인공 류를 진정한 ‘신의 글라스’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세라면 그 위에 술이 아닌 어떤 도구라도 얹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가 갔던 카페 사장도 이 책을 ‘바이블’이라고까지 말하며 보지 않았을까 생각 듭니다.     


   바텐더 류의 성장 측면에서 이 만화는 두 단계의 이야기로 나뉩니다. 그 첫 단계는 호텔 카디널 회장(쿠루시마)을 비롯해 스승·업계 선배들의 도움으로 정체성을 회복하는 부분이고요, 또 하나는 견습사원 와쿠이 츠바사를 받아 가르치며 바텐더가 되도록 이끄는 단계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과 같은 혼자만의 힘으로 성장한 게 아닙니다. 바 방문 손님처럼 상처받은 그를 지켜보며 격려하고, 그에게 자리를 터주고 지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 자신을 스승 삼아 바라보고 따라오는 후배도 존재했습니다. 이들과 캐치볼을 하듯 대화를 주고받으며 관계 맺는 가운데 자기 과거와 내면의 아픔을 직면하고 성찰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오늘도 구도자로 살아가는 류, 만화지만 참 대단합니다. 자기 실력에 자만하지 않고 주변을 인정하며, 제자 앞에서도 견습 스승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맞이하는 것이죠. 이렇게 사는 게 참 어려울 텐데... 3일, 7일, 49~50일, 1년, 3년, 7년 등 방황하고 흔들릴 그 시기들을 딛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갑니다.     


   이 만화 주인공보다 한참 부족한 저는 매너리즘이나 불안, 초조, 짜증 이런 거로 피곤하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딱히 가슴 뛰는 새롭고 더 나은 게 보이지 않고, 보이는 걸 시도하려다 제재와 견제를 받기도 합니다. 구성원을 육성하며 같이 호흡하는 재미를 느끼는가 하면 감 없는 모습을 접하거나 뜻이 어긋날 때 답답하기도 합니다.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권한과 환경에 화가 나는 날 또한 하루이틀이 아닙니다. 시대 탓, 세대 탓, 회사 탓... 여기저기 주변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요. 그런 제게 <바텐더> 류가 건넨 많은 이야기가 힘이 됐습니다. 음주를 좋아하지 않는지라 식사 중심으로 바뀐 요즘 저녁문화를 좋아하지만, 이런 바텐더가 기다리는 곳 한군데 쯤은 2차 자리로 만들어 놓아도 괜찮겠다 생각 듭니다.


   PRrist이자 홍보쟁이로서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애당초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웃음 짓게 하겠다는 삶의 목표를 잡아, 그런 마음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써왔고(처음 약속과 달리 많이 밀려 죄송합니다!), 같은 생각으로 이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칵테일을 통해 손님에게 공을 던지기 위해 수많은 책과 영화를 읽어가며 공부했던 류처럼, 저도 묵묵히 노력을 더 하면서 제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짧지만 진실이 담긴 이글 또한 그 길 가운데 의미 있는 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만화책이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이 작품을 만난 것, 제 삶의 큰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바텐더> 마지막 문구가 떠오릅니다. 


   ‘당신과 만난 이 순간에 고맙습니다.  



   “바만으로는 그저 술을 놓는 널빤지일 뿐이죠. 하지만 그곳에 바텐더가 있기에, 바에 상냥함이 생겨납니다. 카운터 앞에 서 있다면 그게 누구든 바텐더는 절대로 손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용기. 그런 용기를 손님에게 준다. 그것도 바텐더의 일.”

   “사람이 사람에게 남길 수 있는 게 대체 뭘까. 그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기억... 결국, 추억뿐이지 않을까.”

   “처음에 먼저 던지지 않으면 캐치볼은 시작할 수 없어요.”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인생에는 두 가지 삶의 방식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생에는 기적 따위 없다고 여기며 사는 삶, 그리고 또 하나는 인생 전체가 기적이다 여기며 사는 삶. 난 후자를 믿어요.”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남이 있기에 헤어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시작 속에 끝이, 만남 속에 헤어짐이, 삶 속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이전 19화 “벤, 잘 싸워랏!”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