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면서도 실업급여 한 번 탄 적 없는 건 자랑, 안 자랑?
조직에서 살아남는 법이란 참으로 어렵다. 구차하고 어지럽다. 자신을 지우는 방법을 가르치려 든다. 그 피로한 과정에 살아남은 자들의 '곤조'가 있다. 따르지 않으면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맥락이나 동기는 필요 없는 곁가지다. 이런 관습은 '오래된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조직에 원인이 있다. 마땅한 정관이나 규율 없이도 권한은 지나지게 충실히 작동한다.
"신입(경력)이 어디 고개를 들고!" 시선 처리에도 신분이 개입한다. 현대판 골품제가 이런 것일까. 입만 떼도 역모라고 곤장을 칠 기세다. 동아줄에 묶이고 태형을 당해도 반항하는 낯빛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자 조직에서 보호받기 위한 마지막 벽이다. 이런 환경에 이유를 궁금해해 봤자 금기된 연정을 품은 백정 취급만 받을 뿐이다.
"너는 백정이다" 급기야 듣고 말았다. 연차가 20년 가까이 된 사람의 입에서 "000 씨는 배울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서 "퇴사 결정은 자신이 알아서 하는 거"라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인다. 퇴사하겠다는 내 말에 대한 방어기제다. 연차 뒤에 숨어 채찍질을 해대더니 정작 꼬꾸라졌을 때는 몸을 사린다. 어찌나 전형적인지.
이놈, 저놈 양반네 상전 놀이는 익숙하다. 가진 자는 부리려 하고, 고용된 자는 선을 긋는다. 그 선의 경계에서 서로 간의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신분제가 유효한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불합리는 참을만하다. 괜찮지 않지만 참을 수 있다. 다만 이유도 모른 채 가해지는 곤장질은 눈 뜨고 얼굴을 맞는 것처럼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이런 굴레를 몇 번이고 겪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 참으면 조직 순응형 인물이 되고 참지 않으면 사회 부적응자가 된다. 서른이 넘도록 대부분의 직장에선 순응형 인물로 남았다. 그들은 내가 퇴사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자 무엇이 옳은지 의심하게 됐다. '빅브라더'에 눈 떠버린 소시민처럼 말이다.
불안하다. 자리를 박찰 용기는 있어도 뒷감당은 여전히 버겁다.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참아내야 한다. 재정절벽도 뒤따른다. 디스토피아를 벗어났다고 해서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탈 지옥이 천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청춘 바쳐 알아내지 않았나.
나는 조직에 순응한 사람을 새삼 우러르게 됐다. 인간성이나 능력에 따른 존경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생존을 위해 숨죽여야 했던 시간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에 가깝다. 얼마나 많은 양반을 모셔야 했을까. 신분 상승을 의심한 적은 없었을까. 이 지난한 과정을 참아낸 인간이란 얼마나 멋진가.
나는 건 한숨, 나오는 건 풍자뿐이다. 가진 것 없이 지켜낸 인간성 속에선 이 정도 성과라도 감지덕지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며 오롯이 걸어갈 자존감을 지킨 인간은 지나온 환경이라도 풍자하는 법이다. 설령 밥벌이를 져버린 백수의 자기 위로 같을지라도 나는 이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퇴사든 풍자든 어느 것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