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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IM Dec 13. 2021

단상_211213

두려움은 직관의 영역이라 어쩔 수 없다

서울 다이소 합정동점. 4층에 발을 디딘 순간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1.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고단했다. 집에 가면 잠들 것 같아 카페에 갔다. 사람이 제법 있었다. 빈자리에 앉았는데 이 자리만 의자가 한가득이다. 자리가 없던 손님들이 모여 앉았던 것이라 여겼다. 다이어리를 적고 뭘 좀 하는데 직원이 의자 하나만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말소리에 놀라 주변을 돌아봤다. 손님이 빠져서 공간이 휑했다. 혼자서 의자를 독식한 꼴이 됐다. 해명하는 것도 웃긴데 나서서 의자를 가져다 놓는 것도 이상했다.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장을 대신했다. 마스크 때문에 반만 전달된 것 같다. 코로나 시국의 슬픈 단면이다.


2.

슬픈 일은 또 있다. 슬픔보단 분노에 가깝다. 물리적인 파괴력을 동반한 분노는 아니다. 내 평온을 파괴하는 분노다. 일은 이랬다. 다이소에서 생필품을 사고 기분 좋게 매장을 나섰다. 유리문으로 뒤따라 나서는 사람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문을 잡아줬다. 그랬더니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몸만 쏙 빠져나갔다. 무슨 소리 듣자고 하는 일은 아닌데 기분이 좀 그랬다.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제 갈 길 가는데 갑자기 "뻘하게 킹받네…" 소리가 나왔다. 볼륨이 너무 낮아 아무도 못 들은 게 킬포라면 킬포다만.


3.

기자를 그만뒀는데도 콩고물이 떨어진다. 정보 이야기다. 기자는 정보를 가공해서 기사를 만드는데 날 것 그대로의 정보들이 공유된다. 지인들이 대부분 언론계에 종사해 나누는 화두의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볼멘소리처럼 한 적이 있는데 단편적인 정보 습득률은 이 바닥이 최고다. 오늘도 발설할 수 없는 정보를 몇 접했는데 내가 기사 쓸 게 아니라 그런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언젠가 선배 기자의 SNS에서 '기사는 안 쓰고 취재만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이제 좀 알 것 같다.


서울 교보문고 합정점. 매장이 작아진 줄 알았더니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4.

서점에 한 번 가면 몇 만 원 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책 두 권만 사도 4~5만 원이 든다. 3권 이상 사면 그때부턴 부담이다. 책 무게만큼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주 1권씩 꾸준히 읽자는 다짐도 텅장으론 하기 힘들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신간은 맨날 없다. 이래저래 독서가 힘든 환경이라는 이야기로 올해 독서기록을 변명해본다. 의지에 비해 결과가 비루하다. 너무 부끄럽다.


5.

이미지란 무섭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더니 배우 장광 씨가 일행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너무 장광 씨라서 어쩐지 반가웠다. <신세계>를 하도 봤더니 대사도 생각났다. "아녀, 아녀라~ 아녀, 아녀라~"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은 내면에서 발화하는 것으로 쓸모를 다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당을 나서는데 아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알은 척의 부재가 아쉬운 원인이고,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했다는 데 기쁨이 있었다.  "내가 당신의 팬이다"와 같은 말을 한 번쯤 하고 싶었는데.


6.

비둘기가 두렵지는 않지만 비둘기의 날갯짓은 공포 그 자체다. 십여 마리 넘는 비둘기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사람 쪽으로 날아드는 광경은 트라우마 제조기에 가깝다. 학창 시절 '트라우마 만들기' 수업을 위해 준비물을 가져가야 했다면 복수의 비둘기를 골랐을지 모른다. 모자와 가방, 망토 따위에 숨겨서 마술처럼 정체를 공개하는 순간 내 예상이 맞든 내가 맞든 둘 중 하나는 맞을 테니까. 갑자기 이런 망상을 늘어놓는 이유는 오늘 트라우마를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부스러기에 정신이 팔린 비둘기 20여 마리가 1m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날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재앙의 전조. 무리의 대가리가 내 쪽을 향했다면 평화의 쓰나미는 몰려올 수밖에 없다. 그걸 당하고 나서 쓰는 글이 이것. "어엌-"하고 소리까지 질러버렸네. 독서기록과 다른 의미로 매우 부끄럽다.


7.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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